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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린 May 06. 2023

아바타를 위하여 7

7장

"그래? 그럼, 예전의 나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내 도전적인 물음에 그는 이미 오랫동안 생각이라도 해둔 것처럼 술술 대꾸했다. 


"예전의 너였다면 툴라의 방에 난 불을 단순한 화재로 해석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 불이 섹스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쯤은 단박에 눈치챘겠지. 그걸 바라보는 짝사랑에 빠진 소년의 슬픈 관음증도 놓치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나는 버석버석 말라오는 입술에 침을 바르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그냥 그렇다고."


하품을 하느라 쩍 벌어진 K의 입, 그 입을 바라보는 내 귓가엔 눈치 없이 날뛰는 심장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왔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라앉히다 잊고 있던 가방을 다시 떠올렸다. 


'더러운 변태새끼 주제에......'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참기 위해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때까지는 그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된다. 무엇보다 K의 정체를 알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내일 녀석이 외출할 때 미행을 할 계획이다. 저 녀석이 설마...... 갑자기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이곳에 온 첫날, 화장실에서 보았던 물건들의 절반은 여성용 화장품들이었다. 눈썹을 밀 때 쓰는 칼, 까만 케이스가 깔끔해 보이는 콤팩트와 립스틱 그리고 아이라인을 그리는 펜슬까지, 세면대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모친의 것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하지만, 녀석의 어머니는 내가 이 집에 들어 선 이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조금씩 위치가 바뀌어 가는 화장품들로 미루어 볼 때 분명 놈의 물건들이 틀림없다. K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드러누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대고 있다. 


"그런데 말이야. 어머닌 지금 어디서 뭘 하시는데?"

"울 엄마? 네가 그게 왜 궁금해?"


K의 약점을 잡아 보려던 내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 얘기에 그는 눈썹을 치키면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어머니가 대단해 보이셔서. 젊은 사람도 일 자리 찾기 힘든데 네 생활비까지 다 대주시니 말이야."


당황하는 듯한 K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떨떠름했던 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 글쎄, 전에도 말했듯이 어디서 부잣집 영감 하나 꿰차셨나 보니. 아님, 신도들이 많은 교회 앞에 넙죽 엎드려서 구걸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너도 알지 '홈즈의 모험'에 나왔던 동냥하는 신사 이야기. 실종된 남자를 조사했는데, 알고 보니 실직해서 가족부양이 망막해진 남자가 거지처럼 꾸미고 동냥을 했다던 이야기 말이야. 우리 엄마도 혹시 알아, 날 부양하기 위해서 길바닥에 코를 박고 동냥하고 계실지. 난 뭐든 상관없어. 생활비만 따박따박 부쳐주시면 그만이니까."


K는 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모친에 대해 함부로 지껄여대는 녀석을 보니 확실히 정상은 아닌 거 같다. 네 놈의 비아냥거림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녀석의 정체를 밝혀 낼 생각을 하자, 눈치 없는 심장이 또 달음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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