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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Mar 15. 2022

코로나가 아이에게서 ‘짝’을 뺏어갔다.


코로나 시대에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빼앗긴 게 한두 가지일까마는

졸업반 아이는 초등학교의 꽃인 수학여행을  못 갔고

그 아래 아이들은 공개수업, 발표회 한 번 못했다.


엄마들은 입학식도 못 보고 선생님 얼굴도 제대로 뵌 적이 없을뿐더러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지 못한다. 반모임 한 번을 못해서 아는 얼굴도 없이 멀뚱히 학교 앞에 혼자 서 있다.


올 3월 개학식에 아이들은 전면 등교를 했다.

두 아이가 한꺼번에 학교를 간지가 언젠지 손에 꼽을 정도인데 3월의 시작 날부터 기운이 좋다. 방과 후 수업도 한 번 해본 적 없이 2년이 지났는데 3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방과 후 수업이 개강했다.


첫날, 학교를 다녀온 아이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선생님은 어때?”

“아는 친구들은 많아?”

자꾸만 ‘몰라’라며 대화를 끊는 아이에게 이어갈 질문을 찾다

“짝은 어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엄마, 짝이 뭐야?”

짝.. 아이가 짝을 모른다. 새삼스럽게 충격이다.

“옆에 앉는 친구.. 없어?”

다시 아이에게 물어보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아, 옆에 앉는 친구가 없겠구나.’

아이는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바로 옆은 아니고 내가 5 분단이니까 4 분단에 앉는 친구는 있지. 그게 ‘짝’이야?”

‘라떼는 말이야’가 안 나올 수가 없다.

“같이 있는 두 명을 서로 짝이라고 해. 엄마 짝은 아빠야. 코로나 없을 때는 학교에서도 두 명이 책상을 붙여 앉았었어. 책 안 가져오면 같이 보고, 못하면 도와주고 하는 옆에 앉아있는 친구가 ‘짝’이야.”


네이버 어학사전에서 ‘짝’을 찾아보니

1. 둘 또는 그 이상이 서로 어울려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 또는 그중의 하나.

2. 둘이 서로 어울려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의 각각을 세는 단위.

3. 배필’을 속되게 이르는 말.

생각보다 내 설명이 너무 딱 들어맞았다. 훗.


첫 째 어렸을 때만 해도 학교에서 아이의 관심사는 ‘짝’이었다. 짝이 누가 됐는지, 짝을 어떻게 바꾸는지가 대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다. 어떤 짝은 자꾸 책을 안 가져와서 불편하고, 어떤 짝은 똑똑하게 발표를 한다며 제 일인 양 자랑했었다. 여학생들이 앉아있고 남학생들이 원하는 자리에 가서 앉는 달에는 누구 옆에 누가 앉아서 불쌍하고, 누구 옆에 누가 앉아서 부럽다는 말을 한참을 들어줘야 했다.


라떼는, ‘짝꿍’이라고 불렀었다.

시골에서 쓰는 사투리라고 여겼였었는데

파란색, 빨간색 두 가지 맛이 붙어 나온 ‘짝꿍’ 캔디를 보고 아니란 걸 알았다. 시골에서만 파는 캔디를 만들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4년 전 미국의 가게에서도 짝꿍을 발견했는데 맛이 똑같았다! 이름은 너즈 캔디.



코로나가 아이에게서 ‘짝’을 뺏어갔다.

‘짝’은 아이가 학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가장 작은 단위였다. 이제 가장 작은 단위는 ‘분단’이다.

책상 네 개를 오므리는 ‘모둠’이 아닌 그저 책상 하나가 줄을 이룬 ‘분단’.

책상 위에 비죽히 솟아 오른 투명막을 통해 친구들을, 선생님을, 칠판을 보고 있는 아이들은 투명막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느낄까? 혹시 차단당하는 느낌에 조금씩 외로워지는 건 아닐까? 함께 있어도 각자라고 느끼는 코로나 세상의 아이들.


오늘도 끊임없이 올라가는 확진자 수치를 보며 걱정을 삼킨다.

우리가 코로나에서 빼앗긴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갈 수 있을까?

이미 바뀌어버린 많은 것들이 마음의 생채기를 내지 않는, 조금 더 나은 것이기를.


하루빨리 코로나에게서 ‘짝’을 되찾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Main picture by Tuyen Vo i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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