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꿈 하나가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채식주의자>를 보고 나서 2

by 구름
“꿈을 꿨어.” 아내의 이 한마디로 단락이 시작됐다.
무섭고, 춥고, 피투성이 고깃덩어리들이 널려 있는 꿈..
핏덩이가 가득한 고깃덩어리들을 헤쳐나가면서 온몸에 피가 흥건했고,
중간에 고기를 주워 먹은 자신이 마치 자신 같지 않았다. 끔찍하고 이상하다고 느낀 것.

그날 이후,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계란도, 고기도 모두 버린다.

남편은 그 결심을 보고선 이렇게 말한다.


“뜻밖이었다. 그녀에게 저토록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니.”
'아내는 마치 자신의 선택이 이성적이고 타당한 것이라는 듯 차근차근 답했다.'
'악몽 한 번 꾸고는 식습관을 바꾸다니'
'남편의 만류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저 고집스러움이라니'


악몽 한 번 꾸고 식습관을 바꾼다며, 그녀 비이성적이라고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잠시 책을 멈추고 생각했다.

정말 그 꿈 하나가 그녀를 바꾼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주인공 말대로 식습관이 바뀌는 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변하는 건 단순한 생각 때문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 생길 때다.


아내는 꿈을 통해서 느낀 자신의 감정.

그 감정 때문에 식습관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꿈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이 행동을 바꿨다.

결국 ‘꿈’은 이유가 아니라 방아쇠였을 것이다.

여러 번 눌러왔던 마음의 버튼이 마침내 눌린 것뿐이다.

난 이 장면을 읽으며 문득 예전에 본 단막극이 떠올랐다.


<딱밤 한 대가 이별에 미치는 영향>
KBS 드라마 공모전에서 상을 받아, 2021년 스페셜로 방송된 단막극이다.

(딱밤 한 대로 인해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한 여자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의 성장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다)




이 작품에서도 여자 주인공은 ‘딱밤 한 대’라는 사소한 사건으로 이별을 결심한다.

하지만 사실 그건 그녀의 누적된 감정의 마지막 방아쇠였다.

한편으론, 대화로 풀 수 있는 부분이었으려나...

왜 참고 있다가 헤어지자고 하고, 나중에서야 이유를 말해줬나... 여주가 회피형인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남자 친구는 누가 봐도 너무했다.

사랑하는 사람 딱밤을 누가 그렇게 때려? -드라마 속 대사-



그리고 하나 더.

<슬기로운 감방생활>에서 남자 주인공은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의 말에 다시 야구를 시작한다.



그에게 ‘꿈’은 계시나 초자연적 신호가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서 결심해 둔 선택에 명분을 부여해 주는 장치였다.

아마도 채식주의자 아내의 ‘꿈’도 그랬을 것 같다.


아마 책 초반에는 꿈 때문인 것처럼 보여주고,

그녀가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 게 사실은 꿈 때문이 아니었다며,

여러 가지가 쌓이다가 결국 그렇게 된 타당성 있는 이유, 보일 이유는 따로 나오지 않을까?




결혼 전부터 식성이 좋았고 그 점이 특히 내 마음에 들었다.
불판에 얹힌 갈비를 익숙한 솜씨로 뒤집었고 한 손에 집게를 한 손에 큰 가위를 들고
쓱쓱 잘라내는 폼이 듬직했다. 일요일마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요리들도 그럴듯하다.

그러나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 아내를 보며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집안의 가장이었으며(남편의 역할도 톡톡히 했으며)

남편한테 잔소리도 하지 않았고, 아내의 역할도 해냈다.

뻔뻔한 남편. 사랑이 없는 결혼... 나라면, 진작에 도망갔을 텐데.


봄이 올 때까지 아내는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라갔지만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를 한다고 말라지고 다이어트가 된다면 했을 거라며,
사실 그녀가 시름시름 앓게 된 것에는 잠을 자지 않았음이 원인이라고, 아니 꿈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은 그녀가 더 이상 섹스를 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라는 것.
손이 어깨에 닿기만 해도 피했다. 이유를 물었을 때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고기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남편은 섹스를 거부당한 게 불쾌해 보였는데도, 아내의 꿈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피웅덩이에 비친 얼굴에 대한 이야기 따위를 듣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몇 년을 같이 살면서 그걸 물어볼 정도 안 들었다니, 무심하기 짝이 없다.


“그녀는 내가 고르고 고른,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던가.”


나는 이 문장을 읽고 한참을 멈췄다.
오만하게 느껴져서, 책을 읽는데 짜증이 치밀 정도였다.


그는 그녀의 상태가 '걱정'된다고는 하지 않고 '의심스럽다'라고 표현한다.

늘 정신병은 흠이 아니라며 남들에게는 사람 좋은 척 이야기를 해왔지만, 사실은 그게 남의 일이라서 그런 거라고 했다. 정작 자신은 정신병원에 가는 아내 타이틀이 싫었던 거다.

결국 그는 평범한 아내 타이틀을 원하면서, 아내를 위한 어떤 ‘이해’도 하지 않는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틀에서 벗어난 그녀를 불편해할 뿐이다.


10쪽 읽기가 끝이 났다. 나는 책을 덮고 나서 오래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의 변화에 무심한 그가, 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20쪽을 읽고 캐릭터에 내 감정이 생긴 것은, 그만큼 작가님이 캐릭터 설정을 강하게 잘 만들었단 뜻이다.

아내가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그냥 꿈을 꿨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고기’를 버린 건 단지 식습관이 아니라, 그가 만든 '평범한 여자라는 세계’를 거부한 건 아닐까.

그 첫 번째 트리거가 '꿈'이었던 것은 아닐까.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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