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참 많았다. 맨 처음에 다른 나라 사람들끼리는 의사소통을 어떻게 했을까. 왜 그 많은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언어를 구사할까. 주위 어른들게 질문을 하면,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했다. 물론 나는 얌전히 공부나 할 정도의 위인은 아니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성공을 위한 길이 공부만 존재하는 것인지, 성적과 행복이 비례하다고 확신하는지, 공부에 관해서도 수없는 질문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쉽게도 어른들에게 그런 질문은 공부하기 싫은 학생의 투덜거림에 불과했다.
나이를 조금 먹자 내 생각은 쓸데없는 게 아니라 철학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여전히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기는 하다. 세상은 여전히 그냥 살기를 요구한다. 얌전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하고, 예쁜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여전히 합리적인 대답은 없다. 꼭 결혼을 해야 하냐고 물으면 아이를 통해 얻는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부모 생활을 하면서 인간적으로 성장한다는 말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자식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미숙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는 어떤 기분일까. 그런 얘기를 하면 어른들은 여전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핀잔만 준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왜 이렇게 불만이 많냐고 묻는다. 너무 삐뚤어진 사고를 가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본래 철학이란 그런 것이다. 어느 누가 세상의 근원에 대해서 물었겠는가. 궁금한 게 많은 사람들이다.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은 자칫 불만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만약 큰 돌을 손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돌을 더 편하게 옮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요령 피울 생각하지 말고 돌이나 옮기라고 할 것이다. 그들의 열심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저 세상은 언제나 요령피우는 불평쟁이들에 의해 발전되었다는 말이다.
정말 다행히도 불평쟁이들의 쓸데없는 생각은 ‘철학’이란 이름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들은 인류의 기원에 대해 물으며, 세상의 작동원리를 고민한다. 때때로 여성의 인권을 위해 글을 쓰며, 동물의 권리를 위해서 투쟁한다. 누군가가 볼 때는 정말 쓸데없는 일이다. 세상의 기원에 대해 고민을 할 시간에 세상을 살아가는 게 훨씬 이득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역사에 남은 사람들은 그냥 산 사람들이 아니라, 불평하며 쓸데업이 요령이나 피우려 하던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장난은 아직까지도 필독서로 손 꼽히며, 유대교에 대한 예수의 불평은 새로운 종교를 탄생하게 한다.
누군가는 성공한 사람이 말하면 철학이며, 실패한 사람이 주장하면 뭣도 아니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철학이란 그렇게 대단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은 결국 질문하는 삶이다. 내가 지금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지는 않을 테다. 아쉽지만 그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게 내가 질문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행동하지만,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의 동기는 밖이 아니라 내면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그대에게 언제나 질문하고 불평하기를 권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라면 진열 상태에 대해 불만을 가져 보자. 손님들의 동선에 불평을 제기해보자. 아마 그렇게 해서 무엇이 변할 수 있냐고 물을 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민과 시도는 반드시 변화를 낳는다. 당장 시급이 오를지도 모른다. 시급이 오르지 않는다면 경험으로 남으며, 자기소개서에 본인을 능동적인 사람이라고 소개하게 된다.
때때로 철학은 앞에 ‘개똥’이 붙으며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정도 모욕은 감내하자. 본디 진정한 철학자는 반드시 모욕을 받게 되어 있다. 누군가 자신의 철학을 욕한다면 오히려 감사하자. 많은 사람에게 비판받고 있을수록,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우선은 열심히 불평하기를 바란다. 불평은 관심에서 시작한다. 관심이 없다면 불평거리도 없다.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말고 끝없이 불평하자. 그 작은 불평이 반드시 그대의 인생에 큰 변화를 선물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