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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o Nov 16. 2020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어머니와는 참 생각이 달랐다. 피아노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연주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보조 역할에 불과했지만, 10살이던 내게는 너무나도 설레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반주 보조로서 역할이 별로 크지 않더라도, 메인 연주자가 될 몇 년 후를 그리는 아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이 큰 사람이기를 바랐다. 자기 자식이 언제나 주인공이길 원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자식의 성장 스토리는 그저 고난의 길로 보였을 뿐이다.

나는 6개월 전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지금은 어설프지만 몇 가지 곡 연주가 가능하다. 선생님은 내게 10년만 일찍 시작했더라도 잘 쳤을 거라고 얘기했다. 그렇다. 나는 재능이 있었다. 재능이 얼마나 있었는지, 언제 개화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어머니가 그 때 자식의 앞길을 응원해줬더라면, 무대에서 연주를 무사히 마친 내게 꽃 한 송이라도 건네줬더라면, 나는 스스로를 조금 더 믿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생긴 꿈은 프로 바둑 기사였다. 프로를 준비하기에는 늦은 나이었지만, 나이에 비해서는 재능이 있었다. 친척 어른들과 두면 종종 이기는 수준은 되었다. 어머니에게 바둑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지만, 학원비가 부담이 되어 배우지 못했다. 사춘기 때는 글을 쓰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글쓰기 대회에서 종종 수상을 했으며, 국어 선생님들은 항상 내게 글짓기 대회를 권했다. 크고 작은 성과들이 있었고, 자연스레 작가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는 몇 번이고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이 남들과 같기를 바랐다.

공부에는 재능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들어도 흥미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장 최악은 야간자율학습이었다. 글을 쓰고 싶은데 집을 보내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자정이 가까워졌고, 내일을 위해 일찍 잠에 들어야 했다.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작가의 꿈은 금방 접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쓸 만큼, 나는 못된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불신을 견뎌낼 만큼,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 자존감은 최고점이다. 추측컨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좀처럼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작가가 되고 싶을 때도, 신학을 전공할 때도, 목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할 때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나를 지지해주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말을 따르는 건, 어머니가 항상 옳은 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만큼 어머니를 믿고 사랑한다는 증거다. 맹목적으로 믿던 대상에게 한 순간도 믿음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믿기 시작했다. 세상에 날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슬픈 일이기에, 내가 나를 믿기로 했다. 그때부터는 인생이 조금 재미있어졌다. 공부에 소질이 없는 줄 알았는데 성적 장학금을 받았다. 최근 피아노 선생님한테는 재능을 인정받고 있고, 이렇게 브런치에도 글이 연재되고 있다. 참으로 꿈만 같은 이야기다. 나라도 나를 믿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하나 뿐인 어머니마저도 나의 꿈을 지지해주지 않을 때, 나만은 내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내가 무엇이든 잘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참 각박한 세상이다. ‘자존감’은 몇 년 째 베스트셀러에서 내려오지를 않는다. 그만큼 자신을 믿기 어렵다. 그럴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증명하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신뢰를 사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상하다. 내가 나를 믿는데 무슨 증명이 필요할까. 나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믿어줄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수많은 자격증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믿음도 아니다. 내가 나를 믿어야 한다. 그것에는 어떠한 증명도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나를 믿기로 한 순간이, 내 삶이 송두리째 변화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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