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가와 진나라의 공통의 경계선
묵자는 겸애(兼愛)를 통해서 세상의 혼란을 극복하고, 더 나은 세상이 올 것임을 제시했습니다. 묵자가 겸애(兼愛)만을 주장했다면, 종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묵자는 겸애(兼愛)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서 글을 이어갔습니다.
묵자는 세상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든 겸애(兼愛)를 구현하기 위해서 강력한 힘이 필요했습니다. 즉, 위로부터의 개혁, 권력을 가진 상층부의 힘을 통해서 겸애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묵자는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제자들을 각국 제후에게 파견해서 벼슬을 하도록 했고, 자신은 제자를 모아 강학하며 관리로 양성했습니다. 그렇게 권력의 상층부로 진입하여, 그 정치적 권위와 힘에 의지해 겸애(兼愛)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상동(尙同)이라고 합니다.
묵자는 상동(尙同)을 통해서 강력한 하나의 나라, 즉 지금으로 보자면 전제주의 국가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위로 동조하면서도 아래와 결탁하지 않는"다는 표현처럼 군주의 명령에 모두가 하나의 뜻으로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런 군주가 만약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묵자는 이런 언급을 합니다.
"이미 위로 천자에게 상동했더라도 하늘에 상동할 수 없다면 하늘의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추위와 더위가 절기에 맞지 않고, 눈, 서리, 비, 이슬이 때에 맞지 않으며, 오곡이 여물지 않고, 가축이 자라지 않으며, 질병이 유행하고, 거센 바람과 궂은비가 계속 내리는 것 등이 하늘이 내리는 벌이다. 이것은 모두 아랫사람들이 하늘에 상동(尙同)하지 않는 것을 벌하고자 함이다." 《묵자》 <상동(尙同)>
즉, 그 절대권력을 가진 군주가 하늘의 뜻에 맞지 않는, 다시 말해 잘못된 행위를 했을 때는 하늘의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군주를 견제하고, 겸애(兼愛)를 실현시키도록 강제하는 장치를 나름 만든 셈입니다.
묵자는 이외에도 비명(非名)을 주장합니다. 이는 공자가 말한 천명(天名), "군자는 명(名)을 알고 소인은 명(名)을 모른다"에 대응한 것입니다. 공자의 명(名)은 정명(正名) 사상과 상통하여, 일반 백성들의 역할을 수동적, 종속적으로 둡니다. 이렇게 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든 겸애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든 차별을 거부하고, 모두를 사랑하는 혁명적인 사상은 그 조건이 따라줘야 합니다.
그래서 묵자는 공자의 천명(天名), 정명(正名)을 깨트리고자 한 것입니다. 묵자는 명(名)을 만들어내는 것은 통치계급이고, 명(名)을 따르는 것은 피통치 계급이라고 보았습니다.
"지금 명(名)이 있다고 하는 자들은 옛날 삼대의 포악한 걸왕, 주왕, 유왕, 려왕이다. 귀하기로는 천자이고,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소유했지만 이목의 욕망을 바로잡지 않고 마음의 사벽함을 제멋대로 행했다. 밖으로 말을 몰아 사냥하고 안으로 술과 노래에 빠져 나라와 백성의 정사를 돌보지 않고 쓸데없는 짓을 일삼아 백성을 학대하고 종묘를 무너뜨렸다." 《묵자》 <비명下>
추악한 군주들이 명(名)을 날조하여 백성을 미혹시키고, 우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자는 비명(非名)을 통해서, 명(名)이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배당하는 백성들이 스스로 역사의 주인으로 나서기를,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혁명적인 묵자의 겸애(兼愛) 사상은 아이러니하게 진나라와 맞닿아 있습니다. 소박하면서 무력을 숭상하는 진나라, 실리를 추구하고, 실제 혜택을 중시하는 진나라의 공리주의적 가치관은 묵학이 정치적 실험을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나라였습니다.
묵학의 상동, 상현, 절용, 비유는 진나라 정치환경에 적합했고, 통일전쟁으로 확대되어가는 진나라는 신진 관료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진나라와 묵가의 만남은 아이러니하지만,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와, 그런 진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지렛대의 역할을 했던 묵가는 공통된 경계선이 분명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