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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소설:파프리카

사람들이 도로 한가운데서 붐비고 있다.

도로 한가운데가 핏빛으로 물들어졌다. 

어떤 이들은 놀라고 어떤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도로 한 가운데가 수 많은 감정으로 흠뻑 물들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 않게 신경쓰지 않았다. 

예전같았다면 내 일 처럼 나섰을텐데 이제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그 현장을 자연스레 스쳐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텅빈 집으로 돌아와 혼자 요리를 했다. 붉은 색 파프리카를 계속 썰었다. 그러다가 손을 베였다. 

하지만, 난 금방 붉은 액체를 씻어내고 무신경하게 요리를 했다.

붉은 피는 그저 붉은 액체처럼 느껴졌다. 


나는 최근 수 많은 슬픔과 아픔으로 감정에 침수되었다.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이 감정들을 없애기로. 예전 같았다면 판타지 같은 얘기,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이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합법적으로 감정을 없애고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과다한 감정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주는 부서가 생겼다.

그 부서에서 접수를 한 뒤 한 달이 지나면 

1시간 내에 내 감정들을 압축하여 하나의 알약으로 만들어낸다. 


내가 접수처로 향한 곳에서는 부유하기 보다는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중산층 이하의 사람이다.

나는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한다. 밥을 제때 먹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계속 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게 된 이후 일이 잡히지 않았다.

슬픈 것은 슬픈 것. 일은 일. 슬퍼했지만, 다시 타이핑을 했다.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슬픔은 몸 속 곳곳에 침투했다.     


1시간만에 감정들을 응축하고 난 뒤 

마지막으로 테스트하는 것이 있다.


작은 칼로 손가락을 벤 뒤 파프리카를 보여주는 절차이다.

아무렇지 않게 상처가 머금은 피와 파프리카를 보게 되면

이상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절차를 무사히 마치고 지금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감정이 제대로 세공되지 않아

나랑 상관이 없는 사람들의 일에도 마음이 출렁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처음엔 좋았지만 지금은 하얀 백지같은 느낌이다.

감정이 소멸한 상태에서 

감정들이 그립진 않다.

다만,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사진을 보고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 나를 보면 씁쓸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없을 것같아 선택한 것이니,

이제는 이렇게 살아간다.



http://www.bookk.co.kr/book/view/29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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