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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Choi 메덴코 Jun 06. 2020

나는 검정고시 출신, 대학 중퇴자 마케터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기본 스펙 조차 탑재되지 않은 나는, 여태 무려 총 3번의 자퇴를 했다. 인도에 다녀온 후 인도가 내게 마음에 안정감을 준다며 잘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퇴했고 그 길로 인도로 고등학교를 갔다. 근데 그 길도 내 길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유학원 사기를 당해서 위험에 빠졌던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영어를 한 마디 못하던 것이 문제였다. 세 번째로는 원인 모를 공황장애가 생겼던 것이다. 한국 나이 열여덟, 나는 그렇게 두 번째 자퇴를 했다. 이미 내 길은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을까? 인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나는 고집을 부렸다. 그때 알았다. 난 무식하고, 멍청하게 고집이 엄청나구나! 그리고 동시에 알았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실패자, 낙오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시작하여 중고등학교 내내 듣던 그놈의 '수능' 그리고 '인 서울'. 내게 너는 수학을 못하니 좋은 대학에 가지 못 할 것이며 결국 취업을 못하게 될 것이라던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근데 신기하게도 나의 선택이 단 하나도 후회되지 않았다. 왜였을까? 그냥, 나 하나쯤은 그냥 나 답게 살면 안 되나? 모두가 성공한 삶을 살아야 하나? 싶었다. 고작 고등학교 자퇴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한다니 참 이상하고 억울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정규학교가 아닌 대입 검정고시를 선택했다. 고작 대입검정고시였지만, 나름 4개월 동안 열심히 해서 좋은 점수를 받고 19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당연히 그냥 모두가 해야 하는 것처럼 대학에 가야 하는 줄 알았다. 왜 가야 하는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세상에 많은 이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할 만큼의 영어 실력을 기르는 것. 그래서 참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다.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500번을 넘게 보았다. 모든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모든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말이다. 무식하게 따라 했고, 무식하게 좋아했다. 인도에 돌아가 혼자 살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조금 늘었을 때 인도에 혼자 배낭여행을 갔는데 학교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결국 인도에 다시 돌아가려면 나는 대학교를 가야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또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른 채 나는 대학교와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우여곡절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인도에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때 내 나이는 21살이었다. 남들보다 늦었다면 늦은 나이. 하지만 인도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 그게 전부였다. 난 여전히 왜 인도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그때 내겐 전부였다.


Media and Communication 학과를 선택했고, 세부 전공으로 Journalism을 선택했다. 글 쓰는 게 좋고 기자가 한때 꿈이던 것을 고려해 나름 고민해서 선택했었다. 근데 대학생활은 내가 기대했던바랑 너무나도 달랐다. 절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에게도 나의 대학 때 보고 겪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오직 인도인 동기들과 그때 그 이야기들을 한다. 인도 영화 '세 얼간이' 그 영화가 나는 너무 현실적이라서 보기 부담스러웠다. 많은 에피소드 중 하나는, 입학 후 1년이 채 되기 전 두 명의 동기가 학교 생활이 힘들어 자살을 선택했고 그걸 목격한 적도 있다. 말도 안 되게 집에 돈이 너무 많아 그저 대학 졸업이 필요한 인도 갑부들도 넘쳐났다. 학교 내 비리는 어찌나 심한지, 작년엔 모두 밝혀져 학장은 퇴임되었다.


150명이던 과 동기가 6개월 만에 100명으로 줄었고, 유일한 한국인이자 외국인이었던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연속되었다. 내가 기대했던 대학생활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인도 생활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Times of India 기자 출신이던 저널리즘 수업 담당교수님을 보며 인도 사회의 부정부패를 직접 겪었다. 인도가 그저 좋아서 왔던 철없던 나는 힘들게 돌아온 인도에 실망했지만 인도가 좋아 인도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또 이곳을 떠나고 3번의 자퇴를 한다면, 나는 정말 이 세상의 낙오자가 될 것만 같아 겁이 나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모든 것을 참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엔 무엇을 할지 몰랐다. 배운 게 없었다. 내가 뭘 배웠는지, 그래서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냥 인도가 좋아서 왔는데, 이상하고도 충격적인, 살면서 겪지 못할 온갖 경험만 했을 뿐. 그리고 스스로를 사회의 낙오자라 여기며 1년 남은 대학교 중퇴를 선택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주체적으로 눈치 보지 않고 살기로 결심했을 때 고등학교 때 적어둔 희미한 버킷리스트를 보았다. '덴마크에서 살아보기' 이유는 그냥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어찌 생각하면 참 안쓰럽기도 하다. 고작 24살, 뭐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을 찾아 덴마크를 가겠다고 결심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너무 짠하다. 가진건 이상한 인생 경험, 남들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광경들을 많이 보고 겪은 내게 있는 무기는 딱 두 가지였다.


'무모함' 그리고 '실행력'.


난 정말 가진 게 없었다. 학력도, 경력도 그리고 돈도 빽도 없었다. 근데 가진  그 두 가지(실행력과 무모함) 내겐 큰 무기였다. 인도에서 자퇴를 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7개월간 3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이 천만 원이었다. 그걸 들고 나는 2015년, 25살이 되던 해 행복을 찾아 덴마크로 갔다. 그렇게 무작정 한 겨울 이력서 200장을 발로 뛰어가며 돌렸지만, 덴마크어도 못하고 아무런 경력도 없는 아시아인인 나를 써줄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한 달쯤 흘렀을까? 기회가 찾아왔지만 온갖 수모와 인종차별을 버텨내기엔 나는 마음이 너무 여렸다. 그때는 정말 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내 인생은 나 말고 그 누구도 책임져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았기에 또다시 용기를 냈다. 지금 여기서 떨어져 나가면, 난 진짜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겠나 싶어 이를 악물었다.


중간중간 이런 소리를 들었다.



너는 정말 끈기가 없어



끈기, 한국에서는 끈기와 미련의 차이를 모르는 듯했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나를 평가했다. 사실 한때는 내가 그저 끈기 없는 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나는 알았다. 나는 미련하지 않다는 것을. 끈기가 아니라 언제 끊어야 하는지,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 나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을 알았기 때문이란 것을. 다시 우연히 기회를 얻어 덴마크에 있는 작은 호텔의 퓨전 베트남 레스토랑에 프레쉬 롤을 만드는 기회를 얻었다. 주방에서 일해본 적 없는 나였지만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고 싶었고 그래야만 했기에 열심히 테스트를 받고 통과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아지는 모습을 매일 보여주겠다며 매니저의 환심도 샀었다. 나의 간절함을 본 그는 나를 예뻐했고, 일하는 내내 나를 대견하게 여겨줬다. 사실 그렇게 살아도 난 행복했을 것 같은데 참 많은 사람들은 내 인생을 낮게 평가했다. 대체 성공이 뭐고, 그 기준은 뭐길래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일까 싶었다. 내가 블루 컬러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1년 비자 기간을 꽉 채워 근무를 했고, 그때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그는 나의 이 다채로운 인생을 사랑해주었고 감싸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뭐랄까?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게 가족이던, 친구이던 세상이든 간에 말이다. 돌연 듯, 결혼을 미루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내게 남은 건 다 말하지 못한 인생 경험과 주방보조 경력뿐이었다. 그래도 하나도 후회되는 게 없었고 여전히 그렇다. 나의 선택은 늘 옳았다. 다만 나를 증명해보기엔, 내 멋대로 살려면 나도 세상과 한 번쯤은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26살에 깨달았다. 그리고 죽어도 못할 것 같던 것을 하나하나 해보자고 결심했다. 그중에 하나가 한국에서 직장인이 되어보는 것이었다. 해보고 일단 아니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잃을 게 없었으니 말이다. 취업을 선언했을 때, 부모님도 친구들도 내게 3개월도 못 버틸 거라며 그냥 그만두라고 하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게 더 자극을 주었던 것 같다. 왜? 나는 최종학력이 고졸이라서? 그것도 검정고시라서? 내 나이가 26살이라서? 왜 내 인생을 대학 졸업장 하나로 판단하는 거야? 내 주방경력이 뭐 어때서? 좀 덜 똑똑한 게 뭐가 문제인데? 괜한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만들었다.




1. 딱 30일 안에 취업하기
2. 내가 가고 싶은 회사, 내가 고르기.


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나는 해버렸고, 그렇게 3년이 흘러 벌써 4년 차 마케터가 되어있다. 근무하는 곳이 대기업도 아니고 여전히 대학 졸업장도 없지만 나는 그렇게 매일, 매월, 매년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이루어가고 있다. 별로 대단한 일을 한 위인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며 살고 있고 자존감과 자신감이 바닥을 칠 때 나의 선택들을 돌아본다. 나의 간절함과 자격지심은 나를 이만큼 끌어올렸다. 그리고 유의미한 일들을 조금씩 해나가려고 하는 요즘, 나의 무모함과 용기 그리고 실행력이 이어준 인연의 끈 덕분에 얼마 전 아주 간략히 나의 인생 여정과 커리어의 관한 인터뷰를 할 수 있었고 이후 많은 분들이 나의 이야기와 선택들로 용기를 얻고 고맙다는 메시지를 받고 더더욱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성공의 기준도 행복의 기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이루며 살 것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기준이 아닌, 네임벨류로 좌지우지되지 않고 블루 컬러 잡을 다시 시작하건, 백수로 살건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말이다.


사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더 많지만, 간략하게 글로 그리고 인터뷰에 담아 더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길 바라며 남겨본다.




https://brunch.co.kr/@cmk5604/1

https://brunch.co.kr/@cmk5604/106

https://www.youtube.com/watch?v=R_i_5KN61vs


https://www.youtube.com/watch?v=99fye1HXj3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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