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애심 - 1

正臨愛心 - 1

by 요즘씨

2001년 가을이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911테러 사건으로 인한 보도가

쉼 없이 중개되고 있었다.

아찔한 참사에 나 역시 조금은 동요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등장에 이러한 사건들은

새로운 사건들로 희석되어 갔다.

그렇다. 그녀를 만나고부터다.



+


환절기 간 입을만한 옷이 없던 나는 동대문에 갔다.

밀리오레 건물 6층 에스컬레이터 올라가는 방향 우측 매장.

단골손님인 나를 기억해 주는 한나 누나가 있다.

그리고 누나의 곁에는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설레게 하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예뻤다.

미안하지만 나의 표현력의 한계다.

그녀를 단순히 예쁘다는 단어로 한계를 지을 수 없었다.

신비로웠다.



나는 옷을 볼 수 없었다.

가디건을 한 번 보면 그녀를 세 번 봤다.

카고바지를 한 번 보고 그녀를 5초간 봤다.



검은색 긴 머리를 고무줄로 살짝 묶었다.

앞머리 일부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여성스러움.

형광등 빛에 반사가 된 머리임에도

매우 짙은 검은색 머리다.

한나 누나의 탈색 머리에 대조되어 그런가.

농도 짙은 그 검은색마저 내 설렘의 동기가 되었다.



피부가 좋았다.

우유같이 하얀 피부는 아니라 해도,

환한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청치마에,

하얀색 셔츠. 그리고 노란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이목구비 그 어느 곳 하나 모난 구석이 없었다.

적당히 잡힌 쌍커풀, 짙은 속눈썹.

선명한 입술 색. 높진 않지만 예쁘게 뻗은 콧등.

가는 목선. 노란색 캔버스를 지탱하는 발목.


그리고 목소리.

여성스러움이 한껏 묻어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아리는 소리였다.



영화배우 이은주가 생각났다.

그녀는 그런 느낌의 여인이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나는 노란색 가디건과 청바지를 골랐다.



가슴이 뛰었다.



+



“내 친구 예쁘지?”



계산기를 손에 쥔 한나 누나는 가격이 아닌,

질문을 했다.



“어. 예쁘네.”



나는 나도 모르게 빠른 인정을 했다.



“뭐야. 바로 이렇게 인정한다고?”
“정말 예쁘시다.”
“얘 봐? 너 지금 되게 진지해~”
“예쁘니까.”



나는 이런 성격이 아니다.

여자 앞에서 유난히 소심하고, 표현에 인색하다.

그런데, 마치 뭐에 쓰인 것처럼.

그렇게 인정하고 싶었다.



“잠깐 같이, 있다 갈래?”
“그래도 돼?”
“얘. 진짜네?”
“부탁할게. 누나.”



그녀의 이름은 ‘애심’이었다.

비추어지는 이미지와 전혀 다른 촌스러운 이름.

하지만 나는 그조차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소심하고 수줍어했다.

그리고 한번도 남자를 사귄 적 없다고 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는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나이는 26살.

4살 연상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나로 보이지 않았다.

여자로 보였다.



나는 그날 데이트 신청을 했다.



“괜찮다면 언제 같이 밥이나 먹어요.”



한나 누나는 오히려 반가워했고,

나를 지지했고,

우리 둘의 약속 시간을 정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줬다.

조금은 지나쳐 보일 정도로.



“제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그럼, 영화도 같이 볼까요?”



그녀가 다음을 기약했다.




# 1


매장에서 족히 한 시간은 그녀와 함께했지만,

서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한나 누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뭐라 말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10월 3일 개천절.

삼성 코엑스에서 함께 식사하고,

이후 영화를 보기로 했다는 사실과.



그녀의 키는 161Cm.

손과 발이 작고,

쌍문동에 엄마와 같이 살고 있으며,

형제, 자매는 없다는 정도.



그리고 그녀는 정말 예뻤다.



책상 서랍 위에는 아직 풀지도 않은

가디건과 청바지가 봉투에 담겨 있었다.



설레는 가슴과 대조되게 내 몸은

천근만근 피로감이 쌓여 있었다.

불을 끄러 가기 귀찮았지만

침대에 파묻힌 내 몸은 도통 움직일 수 없었다.

오늘은 그냥 그렇게 잠들어도 될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타는 듯한 갈증. 환절기라 하지만 방 안이 너무 건조했다.

그리고 냉랭했다.



주방으로 나가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손가락 발가락 하나도 컨트롤 할 수 없었다.

가능한 것은 눈만 깜빡깜빡 뜨고 있다는 것.



‘아빠가 불을 꺼주셨나?’



분명 불을 켜두고 잤었는데 방안에 불이 꺼져 있었다.

분명 문을 닫고 있었는데, 한 뼘 문이 열려 있었다.

거실 전자시계의 빨간 불빛이 겨우 주변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닿지 않는 곳.

내 방 안의 기준에서 문 경첩 쪽.

그 앞에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엄마?

아빠?



아니다.



분명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그것도 느낌 뿐.

나는 시각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경이

기능을 하지 않는 상태.

오싹하다는 느낌이다.


경첩과 방문의 틈으로 스며드는

붉은빛이 기괴하다.

하지만 어둠 속에 그 정도의 빛으로도

그 형체의 윤곽은 어느 정도 분별 가능했다.



나는 공포감에 시선을 돌렸다.

내 눈에 비친 것은 책상 위에 놓인

헝클어진 옷.

노란색 가디건과 청바지.

나는 분명. 저 옷들을 꺼내지 않았다.


누가?
엄마가?
아빠가?

혹시,
저 형체가?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것을 보았다.

희미한 형체의 얼굴 부분의 윤곽이

이전보다 더 뚜렷해진 기분이다.




분명히 그것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들고, 살며시 흔든다.

마치 내게 인사를 하듯이,



발가락에 힘을 줬다.

저 인사를 더 받으면 안될 것 같다.

손가락에 힘을 줬다.

지금 빨리 이 가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눈을 힘껏 깜빡였다.

다행히 눈은 움직이는 상태.

발가락에 힘을.

손가락에 힘을.



갑자기 귀가 움직였다.

귀의 움직임이 도화선이 되어

온몸의 신경이 깨어났다.



이불 속에 숨어야 할까.

아니 이불을 걷어차야 할까?

짧은 순간에 고민을 마친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책상으로 달려가 스탠드 조명을 켰다.

순식간에 밝아진 방 안.

그리고 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이불을 걷어찬 순간, 기분나쁜 쇳소리로



- 안녕.



이라고 인사하던 그 형체의 목소리.



방 안은 적막했고,

책상 위에는 헝클어진 옷.

그리고 내가 밟고 있는 비닐봉투.

그 미끄러운 느낌조차 기괴한 첫날 밤이었다.



그렇게 나의 악몽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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