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때 처음으로 대학병원에 갔어요. 아기 때 폐렴으로 입원했다고는 하는데 그건 기억에 없으니까 저한텐 처음이죠. 아, 이제 만 나이로 바뀌었으니 일곱 살 때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연말에 태어났거든요. 중요한 얘기는 아니네요. 그날은 수술 마친 엄마를 처음 본 날이기도, 아빠한테 혼난 날이기도 해요. 엄마가 아픈데 텔레비전만 보고 있냐고. 저랑 동생 둘 다 TV에 정신 팔려 있었거든요. 무슨 프로였는진 기억도 안 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엄마가 서운했겠다는 게 내 생각이었는지 아빠의 주입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 내가 다음을 생각해서 엄마의 병이 재발한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죠. 그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암이 재발한 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였을 거예요. 종종 엄마와 병원에 갔는데, 기억에는 늘 겨울이었어요. 가거나 오는 길에 엄마가 군밤을 사줬는데. 저는 그때도 별로 심각한 걸 몰랐어요. 아주 큰 주사를 맞는 엄마를 본 것은 기억에 남아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조직검사를 위해 조직을 떼어내는 과정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봤는지는 모르겠어요. 상상인가 싶다가도 상상이라기엔 너무 뚜렷하고. 앉아 있는 엄마의 갈비뼈 사이로 주사가 들어가는데 되게 아파 보였고, 그때 처음으로 무섭다고 생각했거든요. 병원에서의 일은 왠지 기억이 다 흐릿해요. 가고 오던 길이랑 군밤만 생각나고. 대학병원에 대한 거부감만 남아있어요. 그것도 이제는 괜찮지만요. 요 근래 자잘하게 수술할 일들이 생겨서 자주 갔더니 익숙해졌거든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잖아요.
어쩌면 수술을 하면서부터 엄마 생각을 더 자주 하는지도 몰라요. 근 이 년 동안 종양을 세 개 떼어냈는데요. 가슴에 두 개, 자궁에 하나. 매번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너무 무섭더라고요. 살면서 처음으로 그런 종류의 공포감을 느끼는 날들이었어요. (어떤 공포요?) 지난한 병치레에 대한 공포요. 항암을 시작하면 회사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장기 병가가 있던가? 있다 해도 투병이 길어지면 해고당하거나, 몸이 못 버티거나, 둘 중 하나겠지. 생활비랑 치료비는 어떻게 하지? 보험료는 어디까지 나올까? 결국 아빠한테 손을 벌리게 될 거야. 아빠도, 새엄마도, 내색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짐이 되고 말 거야. 그동안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병이 나를 서서히 좀먹겠지. 엄마도 처음엔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 후 좀먹어 가는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을까. 첫 수술을 앞두고 이런 생각을 하며 많이 울었어요. 사실 그렇게 울거나 무서워 할 일은 아닌데,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지나간 유소년기가 영향을 미친 걸까 싶기도 해요.
환자가 있는 집, 그게 어릴 적부터 당연한 집의 조건인 게 어떤 느낌인지 아시나요? 돌이켜보면 저는 그게 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 오랜 시간을 헤맸던 것 같아요. 사람이 오랫동안 아프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해요. 조금씩 조금씩 잃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는, 제게 그 시간들은… 어릴 때는 이해가 안 되고 서운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 이해돼요. 엄마는 그렇게 오래 아프면서, 자기가 죽어간다는 걸 느끼면서도 최선을 다했을 거예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도,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도요. 엄마의 최선이 제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을 뿐이죠. 그런데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잖아요.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 없었고, 제가 사랑을 좀 덜 바라는 애였으면 좋았겠지만 아니었고. 누구의 탓도 아니라 그냥 좀 불행했던 거니까 어쩔 수 없죠. (사랑을 바랐는데 충족되지 못한 순간들에 대해 좀 더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음. 이미 얘기한 게 많은데. 다시 얘기하거나 덧붙이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별로 의미가 없어요.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그냥, 그때 왜 그랬어? 나 서운했어, 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종류거든요. (그런가요?)
사실 어릴 때 저는 빈말로라도 정이 가는 타입은 아니었어요. 특히 엄마랑은 성격이 상극이었어요. 엄마는, 그러니까 제가 본 엄마는, 비 오는 날이면 뜬금없이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래. 그래서 내가 비를 좋아하나 봐."라고 말하는 사람이었거든요. 말씀드렸다시피 본명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이름도 바꾸고요. 어렸을 땐 그 이름이 엄마 본명인 줄 알았어요. 본명이 아니란 걸 알았을 때부터 어쩌면 엄마와 나는 너무나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몰라요. 만약 지금 제가 엄마 같은 사람을 만나면 재미있어하고 좋아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을 거예요. 어렸을 땐 더 그랬겠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기도 했고요. 말하다 보니 엄마가 저 때문에 서운한 순간이 더 많았을 것 같네요.
엄마가 죽고 몇 년은 죄의식에 시달렸어요. 그 후 몇 년은 원망했고, 이후에는 여러 가지가 뒤섞여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정리하지도 없애지도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지금 엄마를 생각하면,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일단 답답하죠. 묻지 못한 얘기가 너무 많으니까요. 그리고 엄마의 삶, 그러니까 제가 본 엄마의 삶을 생각할 땐 좀 씁쓸해져요. 연민 같은 걸까요? 가족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지 않아도 되는 폭력을 겪었고, 이후에는 암이 삶의 많은 것들을 앗아갔으니까요. 좋아하는 것이나 하고 싶은 일부터, 살고 사랑할 의지까지도요. 너무 많은 짐을 지다 간 삶이라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이 외로운 삶이었다고도 생각하고요. 엄마가 겪은 아픔의 무게를, 저를 포함해 누구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타인인 제가 이렇게 단정하는 게 엄마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저는 제가 경험한 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이걸로 엄마에 대한 추억은 끝이에요. 추억이라 하긴 좀 그런가요? 뭐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엄마가 죽은 후의 이야기는 명확하게 추억이 아니니까, 상대적으로는 추억이죠. 그리고 어쩌면 그때부터 가족사 안에서 제 얘기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엄마가 죽은 날부터요. 그런데 그 얘기는 오늘 못하겠네요. (다음에도 여전히 이 얘기를 하고 싶다면 그때 나눠 주세요.) 네, 들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