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글
남편이 미국 단기 교육에 선발되며, 온 가족이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텍사스에서 오 개월가량 머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 뒤로 몇 년 후엔 캘리포니아에 있는 몬터레이라는 도시에 육 개월가량 머물렀다. 이십 대 시절 버킷리스트였던 어학연수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나는 이 기간 동안 영어공부를 하기로 했다. 미국까지 갔는데 미국 집에만 머물기엔 아쉬우니까... 가기 전 검색해 본 미국 어학연수 비용은 대학 인텐시브 코스 기준으로 주당 600불 정도였다. 가뜩이나 남편 직장에서 주는 해외 체류비로는 턱없이 부족한데 나까지 학비를 대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처지이니 일단 비싼 어학코스는 패스하기로 하고, 최대한 돈이 들지 않고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도착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미국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무료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널려있다. 어느 정도냐면, 대도시의 경우는 도서관에만 가도 무료로 영어를 배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이나 컬리지마다 저렴한 금액의 어학 코스도 있고, 이민자들이나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어덜트 스쿨등이 무료로 운영된다. 그럼에도 미국에는 영어를 못하는 미국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본인들의 커뮤니티 속에서는 한국어, 일본어, 스페니쉬 등으로 얼마든지 편안하게 생활이 가능하기에 성인이 되어서는 독하게 마음먹지 않는 이상 여행 회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에 미국 정부는 다양한 방법으로 영어를 교육하고 있으며, 꼭 미국 시민이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나 무료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을 많이 배치해 뒀다.
텍사스에 있을 때는 집 근처의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두 달 정도 라이팅&토론 수업을 들었다. 커뮤니티 컬리지는 한국의 전문대와 비슷한 공립 대학인데, 우리나라 평생교육원 같은 센터에서 비교적 저렴한 돈을 내고 수업을 듣는거와 비슷한 느낌?? 이때는 말 그대로 평생교육원의 문화센터 수업정도로 가벼운 수업을 들었기에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이십 대 친구들과 사형제도에 대해서 토론했던 기억과 대학 카페테리아에서 맛없는 점심을 먹었던 기억 정도가 남아있다. 그래도 낯선 도시의 캠퍼스에서 공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꽤나 낭만적이었다.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서는 마을에 있는 어덜트 스쿨(성인학교)에서 매일 3시간씩 무료 esl 코스 영어수업을 들었다. 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이민자나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에 체류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좌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이 출근하면 매일 스타벅스에서 오늘의 커피를 한잔 사서 해변을 따라 걸어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지은 지 백 년은 족히 돼 보이는 고풍스럽기도 하고 아기자기하기도 한 집들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우리 반의 esl 선생님은 전직 체육교사인 바바라 선생님이었다. 귀 뒤로 곱게 넘긴 은발머리에 170이 넘는 장신이었던 그녀는 놀랍게도 여든아홉(89) 세였다.(물론 만 나이로 말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하셨다는 아버지에게 건강을 물려받았다는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건 보청기가 유일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와 연결된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수업을 하곤 했는데, 영어가 서툰 모든 학생들의 말을 끝까지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진정한 리스너였다.
어덜트 스쿨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배우기 위해 모여있었다. 미국에서 산지 삼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영어보다는 한국어가 익숙하다는 K부터,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온 귀여운 중국인 J, 문법은 3인칭 단수 복수도 헷갈려 하지만 회화하는 자신감만은 원어민 수준인 멕시칸, 브라질 청년들, 인도에서 학교 선생님을 했다는 60대 할머니, 아직은 영어가 서툰 멕시칸 셰프, 그리고 마음이 가장 쓰였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아이 엄마 B가 있었다. 유독 총명하고,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구사하던 B는 남편을 두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미국 시민권자인 오빠가 있는 미국으로 넘어왔다. B의 아이는 미국에서 킨더스쿨에 다니고 있었는데, 엄마를 닮아 영특한지 B의 아들은 반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장 잘한다고 했다.
"우리 아들 말이야. 이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다면 학교조차 다니지 못했을 거야"
아이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그녀를 보며 전 세계 엄마들은 모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B는 ESL 반뿐만 아니라, 미국 고등학교 졸업반 수업도 듣고 있었다. 나에게 곧 졸업장을 딸 수 있을 것 같다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리사는 경영학 학사가 있다면서? 정말 멋지다. 나도 그런 멋진 학위가 있다면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겠지?"
그때 나는 그녀에게 대충 이런 식의 말을 한 것 같다.
"멋지기는, B는 아직 이십 대라 뭐든 할 수 있겠지만, 난 나이가 많잖아. 한국에선 아무리 좋은 학위가 있어도, 나처럼 애 낳고 경력이 단절되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그때의 나는 회사 퇴직 후 아이를 키우며 한참 자신감을 잃어갈 때였다. 패배주의에 절어 있던 나는 내전의 위험을 피해 남편과 떨어져서 어린 아들과 함께 타지에 있는 애 엄마에게 너와 달리 나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엉뚱한 소리를 해버렸다. 게다가 여든아홉 살 선생님이 가르치는 ESL CLASS에서 나이가 많다는 소리나 해대다니. 참으로 공감능력 떨어진다.
며칠뒤 B는 교실 전체에 기쁜 소식을 전했다. 작은 모텔 파트타임 면접을 통과했다는 내용이었다. 청소하는 업무라 일은 고되지만 아이가 학교에 간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누구보다 좋아했다. ESL반의 모두가 내 일처럼 기뻐하고 박수치며 축하했다. 이렇게 조금씩 자립하면, 오빠 도움 없이 아들을 키우고 비자도 다시 받고 영주권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며 기뻐했다.
그녀는 뭐든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작은 일에도 기뻐했지만, 나는 그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여 있었다. 내가 원하는 일은 남들과 비교했을 때 거창하고 화려한 일이었으니..
사실, 몬터레이에 오기 전 나는 두군데의 공기업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상태였다. 이십대의 나는 회사에 지원했다 떨어져 본적 한번도 없는데, 삼십대의 나는 줄줄이 낙방이었다. 한참 낙담해 있을 때 아는 후배가 미국에서 돌아오면 어린이집에서 파트타임 영어강사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나는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면 주변에 성공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허욱적대고 있었으니까
나는 가끔 여든 아홉의 바바라선생님에게 이런식으로 하소연을 하곤 했다.
"그거 아세요? 한국에선 제 나이에 경력이 단절되면, 뭐든 하기 힘들어요. 저는 망한 것 같아요"
어느덧 육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어덜트 스쿨의 ESL과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비행기를 타기 전 여든아홉의 바바라 선생님에게 나는 이메일을 받았다.
리사에게
네가 고민하고 있다는 일을 꼭 시작했으면 좋겠어. 나도 학교를 은퇴하고 이 일을 시작하며 정말 적은 돈밖에 받지 못했단다. 하지만 너도 알고있듯이 여든 아홉까지 나는 이 일을 하고 있단다. 이 일이 내게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 아니?
리사 넌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엄마로 열심히 살았듯, 이제는 너의 길 또한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뭐든 시작해.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알지? 너는 뭐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란 걸.
멀리서 널 응원하는 바바라 선생님이.
바바라 선생님의 응원과 B를 생각하며 나는 한국에 들어와 퇴직 후 처음으로 파트타임을 시작했다.
별거 아닌 시작일 지 모르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 용기, 과거의 나와 비교하지 않을 용기 말이다. 퇴직 후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나와 달리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던 직장 동료들과 여기저기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던 친구들에게 초라해 보일까 전전긍긍하기만 한채 움츠려 있었다. 뭐야. 쟤 그렇게 큰소리치고 나가더니 한다는 게 고작 아르바이트야?라고 누군가 말할까 봐 움츠려 있었다. 정작 세상은 나에게 관심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시작했다.
여든아홉 나이에 세계 각지에서 온 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던 바바라 선생님을 위해. 그리고 낯선 땅에서 고등학교 졸업시험 준비를 하며 모텔에서 파트타임을 하던 B를 위해.
그리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낸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