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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a May 15. 2024

회사 도서관 개관기

도서관이 좋아서 회사에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는 사내 도서관이 있었다.  네시쯤 졸릴 시간이 되면 오후 햇살이 비치는 도서관에 서서 책을 잠시 읽거나 빌려 나왔다. 한참 책을 열심히 읽던 이십 대 때는 매일 한 권을 빌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읽고, 나머지를 출근할 때 읽어서 일일 일권 독서를 하던 때도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며 공기업 어린이집에서 영어 방과 후 선생님을 할 때 가장 부러웠던 건 어린이집과 같은 건물에 있던 사내 도서관이었다. 사원증이 있어야 문이 열렸기에 나 같은 프리랜서는 들어가 볼 수도 없다. '플란다스의 개'의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그림이 있던 성당 같다고 생각했다. 옛 회사에 있던 그 도서관이 그리웠다.


재작년 만 서른아홉의 나이로 재 취업한 이 회사에는 도서관이 없다. 전업주부로 살 때는 마을 도서관에 자주 갔었는데, 전일제로 회사를 다니다 보니 이마저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도서관을 만들어 줄리 만무하다!


회사에 도서관은 없지만 건전모임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 인 이상 건전모임을 만들면 증빙된 지출에 한 하여 인당 이만 원씩 지원이 된단다. 그래서 나는 사내 '책모임'을 결성했다. 서가가 있는 사무실을 상상하면서.


먼저, 사내 동아리로 인정받기 위해 여섯 명의 회원을 모았다

 마음대로 이름도 지었다

책 한 모금 커피한 쪽


매달 지원금으로 책을 사서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계획서도 작성했다. 회사에 출근한 지 오 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수동적으로 시키는 일만 하다 처음으로 내가 자발적으로 시도한 일이었다.  본사의 결제를 기다리고 있는데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본사: 과장님, 독서모임을 만드셨던데 비용으로 책을 산다고 계획하셨더라고요?

:   각각 원하는 책을 구입해서 책도 읽고 차도 마시려고요.

본사: 모임 하시면서 회식이나, 커피를 드시고 지출결의 하시는 것은 가능하지만... 책은 개인 소유물이 되는 거라 승인이 불가합니다.

나: 회식비도 되고 커피도 되는데, 왜 책은 안된다는 거죠?

본사: 물건이 개인 소유가 되는 거니까요. 취지와 맞지 않습니다.

나: 결국 회식에서 먹은 음식이랑 커피도  피가 되고 살이 돼서 내 개인 소유가 되는 것 아닌가요?  (물론 정색하지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오해 마시길)

본사: 아 그건 다르잖아요 과장님~

나: 그럼 개인 소유만 아니면 되는 건가요? 그럼 저희는 서가를 만들게요. 개인 소유 하지 않고.

본사: ... 상의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며칠뒤 본사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책을 개인소유로 해도 좋다는 의견까지 첨부되어서. 음식도 피와 살이 되니까 개인 소유 아니냐는 논리가 먹힌 걸까? 사내 도서관을 만들겠다는 내 의지가 먹힌 걸까?


책 모임을 만든 지도 일 년 하고도 육 개월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여섯 명이었던 회원은 스무 명까지 늘어났고, 매달 내가 구입하는 책은 평균 삼십만 원이 넘는다. 처음에는 대형 온라인 서점에서 구입했지만, 올해부터는 동네 작은 책방과 거래하기 시작했다. 작년까지 연매출이 오백만 원이었던 사장님은 매출이 올라서 좋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은 책방 사장님이 웃어서 좋다. 가끔 책방에 갈 때마다 최우수 VIP가 된 기분을 만끽하는 것도 좋다. (내가 울 동네 책방의 재스민 회원이다 하하하) 얼마 전 서점 사장님은 우리 회원들을 위해 직접 네 잎클로버를 코팅해서 책갈피도 만들어 선물해 주셨고, 내가 좋아하는 젊은 작가 수상작품집도 선물로 주셨다. 행복은 전염된다. 

작은 책방 사장님이 선물해 주신 작은 책방 에디션 젊은 작가 수상작품집

보통의 직장인들은 월급날이 오면 한 달이 흘렀음을 알겠지만, 나는 매달 책을 주문하며 한 달이 흘렀음을 느낀다. 회원들이 원하는 책을 한 권씩 사주고, 남은 돈은 알뜰하게 모아 공공도서를 구입해 서가에 꽂아놓는다. 책꽂이는 회사비품담당에게 도움을 받아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는 회전용으로 구입했다. 이로써 나의 사내 도서관도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


공공서적은 전적으로 내 권한이다. 최대한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재테크, 인문, 심리 등 베스트셀러에서 선정하지만, 가끔 나만 읽는 사심 섞인 문학책이 포함되기도 한다.


도서관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매달 회원들의 희망도서를 보는 맛도 크다. 요즘 부쩍 슬럼프를 겪는 듯한 A대리는 심리상담 관련 책을... 돈 모으는 재미에 빠진 신입 B는 재테크 책을, 나와 함께 중학생을 키우고 있는 C팀장은 사춘기 아이 관련 책을 고른다. 그리고 부쩍 이색 카페 관련 책만 사모으던 K는 얼마 전 퇴직을 하고 커피숍을 차렸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퇴사한 L에게는 특별히 마지막 책을 집으로 배달해 줬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나만의 작은 틈이 필요하다. 가만히 관찰하다 보면 비교적 건강한 회사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틈을 가지고 있다. 물고기를 키우는 정 대리, 화초를 키우는 정 팀장, 키보드 커스텀에 빠진 김대리, 매주 캠핑을 다니는 김 과장. 


그리고 매달 책을 주문받고 도서관을 만드는 나. 매일 점심엔 근력운동을 하고 수요일 저녁엔 요가를 배우는 남편.


우리에겐 작은 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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