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울림과 떨림 Mar 10. 2022

《사랑의 정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할 때였다. 서로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났다. 아내는 대학교에서 강의로, 나는 신대원에서 공부로 그리고 서로 선교단체에서 훈련하며 날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다. 언제나 그렇듯, 사랑은 그 모든 어려움과 불편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만남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다른 커플처럼 우리도 그랬다. 아내는 아침 일찍 학교 근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그날 강의를 준비하곤 했다. 때로는 아내를 잠깐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같이 지하철을 타기도 했고, 때로는 카페에서 아침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사랑은 물리적인 거리 감각을 먹통으로 만든다. 아마도 심리적인 거리가 하나로 딱 들러붙어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야곱이 라헬을 위해 7년을 며칠과 같이 여긴 현상이 아닐까 싶다. 여느 날 같으면 피곤했을 이른 아침 시간도, 아내를 만난다는 생각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유명한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이 있다. 아내의 사랑의 언어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비록 나의 주머니 사정은 좋지 않았지만, 아내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을 통해서 더 큰 의미와 기쁨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야 서로 얼굴과 은연중 풍기는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듣지만, 연애 초만 해도 성격도 분위기도 사뭇 다른 점들이 많았다. 언젠가 둘이 거리를 걷다가 큰 거울 앞에 나란히 선 적이 있었다. 그때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달라도 이렇게 다를까?' 하면서, 서로 멋쩍게 웃은 적도 있었다. 이 모든 이질적인 것들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 같은 생각과 같은 결을 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어쩜 서로 그렇게 닮으셨어요?'라는 말을 제법 듣는 편이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서로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제자들은 거친 생각과 억센 말투 거기에 틈만 나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얼굴을 붉혔다. 나름 자기를 고상하고 수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수준 떨어지는 사람을 보면 경계하고 선을 긋는다. 골칫거리와 엮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격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는 제자들과 오랫동안 함께하는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십자가를 코앞에 두고서도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유월절 만찬을 먹을 때조차 제자들과 함께 먹기를 원하고 또 원하셨다.


사람들은 워런 버핏 같은 세계적인 투자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면 막대한 돈을 지불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애 마지막이라는 시간을 워런 버핏 같은 사람과 함께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의미있는 사람과 생애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사랑 없이는 어떤 것도 의미를 확보할 수 없다. 사랑하니까 의미있는 것이고, 사랑하니까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 먹기를 누구보다 원하고 또 원하셨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은 내지 않는다면, 그것을 두고 정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하면 그 모든 방해와 훼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그분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을 원하고 원하신다. 그런 우리는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고 있을까?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양심선언을 하자면, 일의 양보다는 늘 곁에 함께 있어서 당연하게 여긴 탓이 더 큰 것 같다. 다시 사랑의 정신 곧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일깨워야겠다.


<사진: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그래서 글을 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