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편한 대로만 생각하지 마.”
순간 멈칫했다. 나는 그저 내 입장을 설명한 것뿐인데, 그게 ‘남을 안 생각하는 행동’이었을까?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걸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감정의 민감도나 상처받는 지점도 다르다.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 사람들은 “배려”라는 단어를 꺼낸다. 하지만 배려란 쉽지 않은 미덕이다. 상대의 입장을 상상하고 내 편함을 잠시 내려놓는, 고도의 감정 노동이다.
내게는 아무렇지 않은 말이 누군가에겐 깊은 상처가 될 수 있고, 내가 편하게 여기는 환경이 누군가에겐 불편함일 수 있다. 같은 말도, 같은 행동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의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이 기준이라는 건 애초에 통일될 수 없다. 각자가 겪어온 고통, 배운 환경, 살아온 방식이 깊이와 넓이를 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같은 수준을 기대하는 건 현실을 잊은 이상주의에 가깝다.
나는 요즘, 간격을 그대로 두는 연습을 한다. 무리하게 다가가기보다 그 사람의 자리에서 멈추는 것이 내가 감정을 지키는 방식이다.
내가 믿는 상식이 모두에게 상식이 아닐 수 있다. 내게 당연한 배려가 누군가에겐 생소한 개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아내의 말을 들은 이후, 나는 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자주 떠올린다.
“저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
이건 누군가를 무조건 이해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나 자신이 불필요하게 소모되지 않도록 감정을 정리하고 내면의 온도를 조절하는 방법이다.
혹시 누군가의 기준에 닿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진 않은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배우고 있을 뿐이다.
배려도 결국은 훈련이다. 시간이 필요하고, 여유가 필요하다. 경험한 바로 여유는 스스로를 덜 몰아붙일 때 생겨난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생각보다 위대한 일이다. 내 삶이 무너지는 듯할 때, 남의 마음을 헤아릴 여력이 없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리 말하고 저녁에 나는 오늘도 그걸 충분히 하지 못했다고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 꼭 기억해 주면 좋겠다. 나 역시, 누군가의 마음속 여백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