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손에 이끌려 나선 길,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히 따스하다. 익숙한 내비게이션 목소리와 조수석 DJ의 선곡이 어우러져 차 안에는 지나간 시절의 노래가 나지막이 흐른다.
옆자리에 앉은 아내는 내가 절대 딴 데로 도망갈 수 없음을 아는 듯,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나도 한때 아내에게 저랬었지'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뒷좌석에는 장모님께서 좋아하시는 아이스크림과 아내가 심사숙고 끝에 고른 빵이 나란히 놓여 있다.
20년 넘게 수없이 오갔던 길.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땐, 어색한 침묵과 괜한 긴장감에 운전대만 꽉 쥐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위'라는 이름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길은 내게 가장 편안한 길 중 하나가 되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창밖 풍경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저 모퉁이를 돌면 어떤 가게가 나타나는지 눈에 선하다.
아내의 넋두리를 들으며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문득 두 달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신 장인어른, 백년손님 사위에게도 거침없이 돌직구를 날리시던 장모님을 처음 뵈었던 날이 떠오른다. 그때는 장인어른이 겨우 6학년이셨는데…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뜻일 게다.)
'코치 아마토르'라는 이름표를 잠시 내려놓고,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사위라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가는 편안함이 이 길에 담겨 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새로운 곳에서만 행복과 위로를 찾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걷는 출근길, 주말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 그리고 이렇게 익숙한 길 위에서 만나는 평온함 속에 이미 삶의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는데 말이다.
처가에 거의 다다를 무렵, 도로 위의 무법자 때문에 대화의 주제가 급하게 바뀌었다. 아내가 말했다. "왜 저래? 똥 마려운가." 나는 웃으며 "응, 그런가 보다"라고 대답했다. 짧은 대화마저도 정겹게 느껴진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저 멀리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익숙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작지만 단단한 의미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길이 바로 그런 의미를 확인하는 쉼표가 되어준다.
✍️ 여러분에게는 잠시 쉼표가 되어주는 익숙한 풍경이나 길이 있으신가요? 그 길 위에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