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글렌 리(Glenn Rhee)라는 이름을 들어봤을까? 한국계 미국인 남성인데, 미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실존인물은 아니고 좀비로 인한 종말을 다루는 미국의 드라마 '워킹데드(The Walking Dead)'에서 활약한 캐릭터다. 우리에게도 옥자, 버닝, 미나리에 출연해서 잘 알려진 배우, 스티븐 연(Steven Yeun)이 연기했다.
글렌은 좀비 종말이 오기 전에 피자배달부로 일을 했는데, 배달을 위해 지역사회 곳곳을 빠삭하게 외우고 있었고, 이 지식에 기반해 빠르고 효과적인 길 찾기라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종말 후, 이 역량을 좀비로 이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른 생존자들을 찾고 구출하거나 여러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찾는데 활용한다. 게다가 상당히 친근한 성격이라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에서도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여러모로 사랑받기에 충분한 캐릭터다.
드라마 속, 글렌 리의 모습. 앳된 스티븐 연의 모습이 귀엽다..(자료 : 워킹데드 시즌1) 만약에, 아주 만약에 우리 지역에 어떤 재난이 닥쳤다고 한다면, 그로인해 우리 지역에 고립됐다고 한다면,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생존율을 갖는 사람은 누구이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나는 단언한다. 바로 글렌과 같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우리 주민들 각자라고 말이다. 정말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 좀 더 협소하게 우리동네에 대해서, 가장 전문가는 외부인이 아니라, 바로 주민들 각자다.
좀 믿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일본의 고베대지진을 예로 들어보자.
진도 7.2 규모의 고베대지진은 사망자만 6434명, 부상자 4만3700여명, 행방불명 3명 등 수만명의 인적피해가 발생했다. 경제적 피해는 1400억 달러에 달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2처 대전 이후 최악의 대재앙이었다.
새벽 5시 46분에 발생한 대지진에 정부의 개입은 늦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당시, 어떤 형태로든 구조된 사람 3만 5천여명 중, 80%가 바로 가족 및 이웃 주민에 의해 구출됐다고 한다. 어느 집에 몇 명이 살고 있고, 혼자 사는 노인과 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를 가장 아는 사람들은 바로 인근 주민들이었던 것이다. 이 재난 이후에 일본에서는 재난대응에 '주민 네트워크' 조성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고베대지진으로 발생한 주택가 피해모습(자료 : 일본 소방 방재 박물관(消防防災博物館) 홈페이지)
주민들이 갖는 지역에서의 일상적인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쌓인다. 지역에 대한 역사, 여러 자원에 대한 이해, 네트워크 등을 바탕으로 동네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가고 있다. 각자 생업이 바쁘고,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만약에 지역이 겪는 일상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시간과 예산이 주어진다면, 주민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관점과 경험을 통해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세상에 아직 좀비가 출현하지 않았으므로, 각자가 지닌 지역사회에 대한 지식은 사용되기 어렵겠구나하는 아쉬움이 들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주변을 살펴보면, 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네에 문제는 존재하고, 글렌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역을 좋게만드는 주민들이 있다.
우리 지역의 워킹데드 시즌 1. 빌라(다세대주택)의 주민들
혹시 저 기억하세요? 몇 년전에 저기 빌라에 살았었어요. 저 집에 지금 외국인 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언제쯤부터 살았는지 아세요?”
얼마 전, 뚜벅이였던 나는 아주 우연히 약 2년 정도 살았던 빌라 앞을 지나게됐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는 굉장히 보기 힘든 인종의 외국인들이 마주오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인도인이었던 3명의 남성은 장을 잔뜩본 종량제 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알뜰하게 물품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내가 살던 빌라로, 그것도 내가 살던 층수인 2층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굉장히 황당했다. 왜냐하면 내가 이 빌라를 떠난 다음에 한국인인 젊은 청년에게 월세를 내주며 근처 월세집과는 다르게 에어컨, 냉장고, 전자렌지, 세탁기, 책꽂이 등의 가구들을 빌려주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집주인은 막 외국에서 온 한국인 청년을 생각해서, 또 그가 집을 깨끗하게 사용할거라는 믿음으로 편의를 아주 많이 제공했었다. 나와 집주인은 여전히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바로 집주인에게 연락을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는 그럴일이 없다고 했다. 이어 월세를 사는 청년에게 연락을 했더니, 친구들이 잠시 한국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설명을 했다고 했다. 어떨때는 상대방의 말이 그냥 거짓말처럼 들릴 때가 있다. 이번이 그런 경우였다.
다음날 다시 그 동네로 향했다. 서울 한복판의 빌라단지인데도, 이 동네에 오래전부터 살았던 주민들이 많아서 동네 사정에 밝은 분들이 많았다. 특히 근처 빌라 중에 1층에 비교적 넓은 터가 있어 늘 모여 이야기를 나누시던 할머니들이 계셨다. 그 분들을 뵙고자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아주 다행히 그 분들께서 나와계셨다. 5명의 할머니들은 저마다 손에 다른 모양의 부채를 흔들고 계셨다.
나는 인사를 드리며 여쭈었다. "혹시 저 기억하세요? 몇 년전에 저기 빌라에 살았었어요. 저 집에 지금 외국인 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언제쯤부터 살았는지 아세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평상시 품었던 의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이 앉아계시던 빌라의 입구, 계단에도 앉으시고, 가장 넓은 부분에는 목욕탕 의자같은 것을 두거나 돗자리를 펴고 앉아계신다 결과적으로 임대했던 순간부터 거의 2년을 넘게 집주인 동의 없이 빌려주는 전대차 사업을 하고 있던 것을 알게됐다. 그것도 자격없이 불법으로! 한 주민분께서는 그동안 짧은 기간마다 바뀌는 사람들 때문에 안전문제와 쓰레기 문제로 골치가 너무 아팠다고 했다. 동네분들은 적극적으로 정보를 주시며, 여러 상황을 제보해주었다. 그 정보들을 모아, 임차인에게 전화를하고, 상황을 읎어주었다. 그는 결국 사죄를 했고, 이후 사태를 일사천리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서울시는 빌라로 칭할 수 있는 다세대주택이 26.4%나 된다. 허나 대부분의 빌라들은 쓰레기나 분리수거, 정화조, 옥상, 주차, 계단청소 등과 같은 일상 문제 해결에 중심을 두고, 주민들의 교류나 소통도 이 정도 차원에서 주로 이뤄진다. 솔직히 너무 아쉬운 지점이나, 왜냐하면 같은 거주공간이라는 공통점과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단순 관리 외에도 주민자치를 더 밀도있게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빌라의 불법 전대차 사태가 빠르게 해결된 것은 그 빌라지역 분들에 의해서였다. 특히 할머니들이 운영하고 계셨던 동네 광장의 역할이 컸다. 그래서 근래에는 다소 취약한 빌라 지역에서, 동네 광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경기도는 행복마을관리소라는 것을 운영해오고 있다. 2019년부터 경기도에서 시행하고 있는 주민 생활밀착형 공공서비스 제공 사업이다. 원도심 지역의 주거 취약지역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유사하게 주민의 안전관리, 생활편의 서비스를 공급하는데, 2022년 기준으로 경기도 내 95개소가 있으며, 주로 원도심 지역 내 유휴공간(주민센터, 경로당, 빈집)을 활용하여 다가구, 다세대 밀집 지역 위주로 설립되고 있다. 오래된 빌라나 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 '관리사무소'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경기도 외에도 최근에는 서울시 강북구의 미아동·수유동에는 빌라에서도 ‘관리사무소’를 두고 있다. 빌라와 같은 소규모 공동주택도 아파트처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한다. 점차 확산하려하는데, 이 사업은 강북구청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의왕시에서 운영중인 경기행복마을관리소(자료 : 퍼블릭뉴스)
아파트에만 관리사무소를 둬야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와 다세대 지역에도 관리소를 둔다는 생각은 확실히 창의적이다. 앞으로 사회구조적으로도 인구가 점차 고령화되고 1인기구가 기아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어서 도시 특히 원도심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체를 이룬다는게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 곳곳에 마을관리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 더 많아지면 지역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서로 소통하며 동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지역의 워킹데드 시즌 2.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그래서 공용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을 누가 선정하는건데요? 그것도 보증금도 없고, 그 정도의 금액으로 말이에요?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는 약 5,100만명이다. 그런데 이 중 아파트 거주 인구가 약 2,900만명으로 전체 인구 중 57%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공동주택관리법 등 제도를 통해 시민들의 공동주택 관리를 촉진하고 있고, 주민들이 아파트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광장으로는 대표적으로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가 있다.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자료 : 스카이데일리) 지어진 지 20년쯤 된 아파트가 있었다. 이 아파트에 청소년 때부터 거주해 이제는 30대 중반이 된 그녀는 나의 친한 지인이다. 아파트를 다니던 어느날 문득 단지 1층에 있는 공간에 누군가가 짐을 옮기는걸 보고 궁금해졌다. "저기는 왜 자꾸 이용하는 사람이 바뀌지?" 그러면서 자신이 첫 투표했을 때, 저 공간이 투표장이었던게 기억났다.
공간에 정보를 알고 싶어 찾은 관리사무소에서 소극적인 관리소장을 알게됐다. 그는 알겠다고, 곧 설명드리겠다고 이야기한 뒤, 뚜렷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한달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아파트동대표회의의 회의결과에서 '공용공간에 대한 논의 안건'이라는 제목과 '추후 다시 상정하기로 함'이라는 결과만 엘리베이터 게시판에 붙었을 뿐이었다. 다시 찾아갔더니, 자세한 것은 입대위가 아니라 말씀드리기 어렵다고하는 소장님.
답답해진 지인은 입대위 회장의 연락처를 알아냈고, 그에게 상황을 물었다. 입대위 회장은 말했다. "사실 저도 골치가 아프네요. 아파트 지어질 때부터, 공용공간을 임대해주던 당시 초기 입대위 회장이 있었어요. 벌써 20년 동안이나 그 사람이 관리를 주도하고 있어요. 그나마 언젠가부터는 관리사무소에서 계약을 맺고 있는데, 그 전에는 계약관계도 어떻게 되는지 몰랐어요. 이걸 해결이라고 하려면, 기존의 입대위 간부들이 몰려와서 훼방을 놓다보니 저도 눈치만 보고 있어요." 즉, 초기 입대위에서 아파트 공용공간을 임대 및 관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살아온 세월이 20년이나 되는데, 전혀 몰랐던 지인은 황당하면서도, 화가나서 아파트 커뮤니티인 한 앱에 들어가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려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한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바로 이 사실을 아파트 주민들에게 '공론화'하는 것이었다.
아파트마다 감시가 소홀하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이 사례도 공용공간을 불법 개조해 사적으로 사용한 사례다(자료 : jtbc) 그 때부터 그녀는 만나는 주민들에게 이 일들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존에 없었던 카톡방 개설을 시작했고, 주민들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아파트관리사무소에서 개최하는 입대위 회의에 참관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익명으로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자 소문이 점차 퍼졌다. 그리고 어느날 과거에 입대위에 참여했던 주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지금 아파트에 안좋은 소문이 퍼지면,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해보는게 어떨까요?", "아뇨, 저는 직접 뵐 생각은 없구요. 공용공간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그동안의 내역서와 앞으로 계획을 주민들 모임을 개최해서 설명하고 정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전화를 걸어온 과거의 입대위 간부는 몇 차례 설득을 시도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좋게 해결해보자니까요.", 결국 화가난 지인은 말했다. "그래서 공용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을 누가 선정하는건데요? 그것도 보증금도 없고, 그 정도의 금액으로 말이에요?"
이 사건의 결말을 어떻게 됐을까? 아쉽게도 현재 진행형이다. 관리사무소는 아직도 정보공개를 하지 않아 공용공간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불투명하고, 전 입대위에서는 전체 주민 대상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을 여러 방법을 사용해서 막고 있다. 예컨대 입대위 회의 안건을 묵살하거나 게시판에 글을 붙이면 바로 떼어내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지인도 계속 사람들에게 알리고, 뜻에 공감하는 주민들을 모우고, 행정 등에도 문의하고 있다.
이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될까? 공적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사용하던 사람들의 승리일까? 사적 공간으로 이용되는 공적 공간을 모두에게 돌려주고자하는 사람들의 승리일까?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틀림없이 후자가 승리할 거라고 본다. 왜냐하면 법과 제도가 내 지인이 요구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고, 이에 공감하는 주민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아파트들을 보면, 오히려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는 신규 입주 주민들이 대체로 공동체를 이뤄 공론장을 통해 의견을 만드는 방식에 잘 참여한다. 그런데 오히려 오래된 아파트는 원주민과 더불어 집주인과 임차인 등 주민 간에도 여러 상황이 존재해서 오히려 소통과 교류가 쉽지가 않다. 지인의 아파트도 이러한 상황이었다. 다만, 안건이 너무 엄중하다보니 사실을 알게된 주민들은 '이건 아니다' 싶어 계속 참여하게되는 것이다.
입주자대표회의의 어두운 면을 조명했지만, 입대위를 잘 운영한다면, 더 좋은 아파트를 만드는데 정말 효과적이다. 경기도 안산시 한 아파트는 입주자대표회의의 모토가 ‘소통과 공감대’라고 한다. 층간소음 문제에서는 이해당사자 간 식사자리를 통해 직접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도 하고, 공용 공간을 비롯하여 집 안 내 흡연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경청의 태도로 대화를 시도했다고 한다. 많은 지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초중고 돌봄 문제도 아파트 공용공간을 활용한 작은도서관과 교육프로그램 등으로 문제해결을 노력했다. 주민 소통을 위해서 단톡방과 카페를 만들었고, 약 1,500가구에 단톡방에는 700명, 카페에는 2,00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차량 주차 관리 문제는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주민대표들과 의견을 모아 외부인 주차 시 한 세대당 100시간 할당과 초과시 30분당 600원을 받는다고 한다. 법적인 문제도 시청 담당과에 문의해서 해결을 했다.
또 하나의 사례는 ‘사회적협동조합 위스테이’다. 입주자들이 사회적협동조합 위스테이를 조직하여 아파트의 공급과 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주거모델이다. 현재 1호 별내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2호 지축은 경기도 고양시에 각각 아파트 공급을 완료하고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해 법정 기준의 2배가 넘는 넉넉한 공간을 제공하는게 철학이라는데, 입주 시기에는 커뮤니티 공간 디자인 워크숍으로 입주자의 실질적 요구를 반영하고 커뮤니티 공간을 만드는 공론장을 운영한다. 초기 아파트 설계 시, 주민 의견을 들으며, 고무칩 놀이터에서 모래 놀이터로 시공을 변경하기도 했다. 1표 차이였다고.
아파트에서 주민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원활하게 살아가게 돕기 위한 제도가 잘 만들어져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사람이 실행한다. 모든 문제는 참여와 소통, 정보공개와 토론, 결정과 실행의 과정을 거치게 될텐데, 이를 위해서는 역시나 제대로된 광장과 여기에 참여하는 주민들이 필요하다.
우리 지역의 워킹데드 시즌 3. 주민자치회와 리빙랩
"특히 요즘 폭염이다 폭우다 하는 재난이 정말 무섭던데, 우리동네에서는 저기 빌라단지에 불이라도 나면, 사람들 다치는건 정말 순식간이에요."
경기도 00시에 00읍에는 2022년 기준으로 약 23,000명이 거주하고 있다. 하천을 두고 오른편에는 원도심이 자리하고 있고, 왼편에는 아파트로 변화될 도시개발이 예정되어 있다. 이 동네는 주민자치로 상당히 유명한데, 명성에 맞게 지역주민들이 주민자치에 관한 성공적인 사례가 정말 많다. 과거 주민자치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주민자치회관의 강좌를 보면 분기별로 모집하는 강좌가 무려 70여개 넘는다.
춘천시는 주민자치회 가이드북이라는 것도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자료 : 춘천시청) 주민들이 스스로 해낸 경험이 많다보니, 주민자치에도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앞에서 살펴본 '마을재난대응'이라는 주제의 주민자치였다. 우리 동네에 재난이 발생한다면, 재난의 초기대응을 마을사람들이 해보자는 주민자치회의 작당공모였다!
주민들에게 우리 마을에서 주목해야할 재난이 무엇인지 물으니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어줬다.
비가 오면, 하천이 범람할까봐 위태로운 순간들이 많죠. 운이 좋게 넘어간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들면, 저쪽 지하에 있는 노래방 바로 옆에 하천이 있는데, 하천이 넘치면 순식간에 잠길걸요?
재개발이 있다보니까, 건물들을 부수기 전에 방치해둔 경우가 많아요. 그리 늦지 않은 밤인데도, 걷다보면 무섭고 섬뜩할때가 있어요.
눈오면, 이쪽 아파트 입구쪽은 난리가 나요. 다행히 여기는 바로 제설작업을 하는데, 저쪽 빌라단지쪽 언덕은 제설차가 들어갈수도 없고 제설함도 비워있고 아주 그냥 난리에요. 주민들이 치워야죠
재난이 일상화되는 시대가 됐다고 하잖아요. 요즘 폭염이다 폭우다 하는 재난이 정말 무섭던데, 그러다보니 전기기기들도 엄청 이용하잖아요. 만약에 우리동네에서도 불이나고, 특히 00빌라단지에 불이라도 나면, 사람들 다치는건 정말 순식간이에요. 거기에는 어르신들도 많아요
다양한 의견의 핵심에는 마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난의 종류와 장소, 또 더 취약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만 끝나면, 그저 공염불이 됐을 것이겠지만, 주민자치회 사람들은 달랐다. 이에 더 천착하여 주민자치회에서 재난이 일상화되는 사회에서 마을이 직접 대응하고자 '마을재난지도'와 '마을재난대응 액션플랜'이라는 두 가지 사업을 추진했다.
마을재난지도 팀에서는 마을 곳곳에서 우려되는 재난사항을 상상하며 지도에 표시했다. 이후 마을 곳곳을 직접 탐방하여 상상했던 곳들을 확인했고 지도를 계속 업데이트했다.
액션플랜 팀에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관리해야하는 재난을 찾는 것부터 시작하여 화재취약주거단지를 발굴하였고, 화재발생 시 소방차진입로 확보 등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화재취약주거단지에서 지역사회의 다양한 주체들과 협력하여 마을재난대응훈련 했다.
이 과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공론장이었다. 주민자치의 경험이 많은 위원들과 신규위원들 간 지역의 주민자치에 대한 역량 차이를 좁히는 교육을 비롯해서, 더 역할을 많이 수행하는 위원들과 생업 등으로 역할 수행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위원들이 모두 저마다 가능한 역할을 할 수 있게 조율하기, 실질적으로 사업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법과 대안들을 모두 공론장에서의 협의를 통해 도출했다.
리빙랩이 뭐여? 주방용 랩이여? 아니, 음악 장르여?
리빙랩을 처음 들었을 때, 주방용 랩을 생각했던 건 나뿐이였을까? 음악 장르를 떠올리셨던 분도 계셨다. 못 들어보셨어도 전혀 상관 없다. 앞서 얘기했듯이 나도 처음에는 주방용품인 줄 알기도 했으니.
리빙랩이란 ‘기술 또는 사회의 혁신을 목표로 고안된 현장 중심적 문제해결 방법론’이다. 살아있는 실험실이란 의미인데, 초기에는 미국에서 수요대응형 신기술 혁신의 방법론으로만 여겨지다가 유럽으로 전래된 후 사회혁신 방법론으로 재해석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행정, 기업, 학교, 지역사회 등에서 혁신을 원할 때 리빙랩이란 방법론을 사용하기도 한다.
사실상 처음으로 전국단위로 리빙랩을 추진했던 곳은 행정안전부였다. 이름하여 '국민해결 : 국민참여 사회문제 해결 프로젝트'로, ‘환경·자원순환’, ‘유휴공간’, ‘청소년·청년’, ‘노인’, ‘장애인’ 등 10개 분야 20개 아이디어를 리빙랩 방식으로 추진하며 지역의 문제해결을 시도했다.
여러가지 사업들이 추진됐는데, 이 중 ‘아파트 단지 내 디자인을 변화시켜 노인치매를 예방하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생활체육 모델 만들기’, ‘하천 유휴부지를 시민의 손을 거쳐 공동체 정원으로 만들기’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당시에 90대가 된 조부가 치매로 자꾸 길을 잃어서 마음 아팠는데, 주거공간에 인지디자인을 적용하여 치매노인이 길을 잃지 않도록하는 사업이 크게 공감되기도 했었다.
시민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하고, 시민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촉진했던 이 사업은 그 자체만으로 굉장히 의미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리빙랩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국민해결과 빗스한 사례로 서울시가 노원구 공릉아파트에 '인지건강디자인'을 시범 적용해 본 결과 주민의 인지장애가 30.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머니투데이)
리빙랩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기술과 시민참여를 기반으로 우리 생활에 필요한 정책을 실험한 사례도 있다. 서울연구원은 서울주민의 생활권 내 대기오염관리를 아주 간단한 기술과 시민참여의 방식으로 추진했는데, 이 역시도 리빙랩이라 볼 수 있다.
본 사업에서 나는 서초구에서 공론장 활동가로 참여했는데, '서울연구원-서초구 구정연구단-서초구청-서초구민-공론장 활동가'과 협력을 통해 주민 생활권에서 대기오염이 심할 것으로 예측되는 장소를 정하고 그곳을 시민들이 직접 다니며 휴대용 미세먼지 측정기로 대기질을 체크하고 정책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총 4회의 공론장과 시민중심의 문제해결을 위한 학습 영상 자료를 제작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서초구 내 주민생활권에서 대기오염이 심한 곳을 발굴하고 거기에 맞는 정책 아이디어를 도출해서 행정에 연계했다.
주민자치회와 리빙랩과 같은 주민이 주도하는 문제해결 광장에는 좀 아쉽지만 젊은 세대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저조하다. 아주 흔히, 어쩌면 당연하게, 지역의 주민자치나 문제해결을 최소 중년쯤 되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현실적 어려움(대표적으로 시간 등)이 있지만, 다양한 세대가 참여하는 주민자치 광장에서는 더 신선하고 중요한 아이디어들이 많이 다뤄지고 논의되는데, 청년들의 참여가 저조한게 늘 안타깝다.
청년들이 함께 주민자치에 참여하면, 가장 대표적으로는 스마트기술이나 IT 솔루션을 다루며 젊은 감각으로 동네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세대의 어른들과 함께하다보면, 특히 지역에서 활동하는 어른들 중에서는 정말 본받을 점이 많은 어른들도 존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강명 작가는 <아무튼, 현수동>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동네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삶도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도 확장할 수 있을까. ‘자기 동네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사람은 자기 삶도 가꾸는 중이다’라고. 『아무튼, 현수동』을 쓰는 동안 나도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헤아린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역공동체에 대한 관심이나 책임 같은 것. 시니컬한 척하느라 어릴 때에는 잘 살피지 않았던. 그래서 나는 이 책 독자들께도 살고 싶은 동네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빌라든, 아파트든, 주민자치든, 리빙랩이든, 청년 커뮤니티든, 아니 뭐든지 간에, 주민들이 지역을 더 좋게만드는 것에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엄청난 결속으로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자고 초대하는 것은 아니다. 딱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낸다면, 그만큼의 문제도 덜어질 수 있으니, 아주 가볍게라도 지역에서의 여러 활동을 알아보고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