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udovico Sep 02. 2024

모든 지역사회에는 광장이 있(었)지(1)

③광장 채우기

팍팍한 하루를 보낸 어느날, 퇴근길에 합정역에 있는 대형 서점에 들렀다. 세계문학이 꽂혀있는 코너를 배회하다가 그 전부터 스쳤겠지만 눈에 띄지 않았던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가 눈에 확 들어왔다. 아마도 분노할 일이 많았던 하루 덕분이었을 것이다.
문득 '분노하는 포도의 모습이 어떨까?'하는 1차원의 아재개그적 호기심과 '분노하면 얼굴이 빨개지니, 빨간 포도인가? 피로 물든 포도야?'와 같은 부끄러운 상상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어쨋든 '분노의 포도' 1~2권을 구입한 뒤 집에돌아와 며칠 간 읽었다.
소설은 1920~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절, 주리는 동부의 농민들이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며 서부로 이동하며 겪는 사회부조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살기 좋았던 동부와 척박한 서부를 가르는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약 10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은 동부와 서부의 차이 뚜렷하다.

동부에는 미국 인구의 약 4분의 3이 거주하고, 100만 이상의 도시가 뉴욕을 중심으로 걸쳐있다. 이에비해 서부는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 등은 대도시지만 그 주변에는 산악지대나 사막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격차를 만드는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물에 대한 접근가능성과 풍부함이 동부와 서부를 가로 지른 것이다. 특히 기본적인 생존 외에도 산업계 등 경제영역에서 물은 필수 자원이라 물이 풍족한 동부가 더 많이 발전할 수 있었다.

미국의 카운티 별 인구밀도 지도. 진한 파랑일수록 인구밀도가 높음. 미국 동부 지역과 서부 지역의 지난 30년간 강수량 비교. (자료 : 위키백과, 경향신문)


물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에서 지역사회가 형성하고 공동체가 만들어지는데 가장 큰 요소였다. 물과 공동체에 대하여 기록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가 구약성경일 것 같다. 창세기의 야곱과 탈출기의 모세의 일화에서 당시 유목민 사회에서의 있을 법한 물과 그에 관한 에피소드가 언급된다.

장면1. 야곱은 발걸음을 옮겨 동방인들의 땅으로 들어갔다. 그가 보니 들에 우물이 하나 있고, 양 떼 세 무리가 그 곁에 엎드려 있었다. 그것은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우물인데, 그 우물 위에는 큰 돌이 덮여 있었다. 가축들이 그곳에 다 모이면 목자들은 우물에서 그 돌을 굴려 내어 양 떼에게 물을 먹인 다음, 그 돌을 다시 우물 위 제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었다.

장면2.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고 어떤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미디안의 사제에게는 딸이 일곱 있었다. 이들이 그곳으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서는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 하였다. 그때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었다. 그러자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

물이 인류 지역사회에서 역할을 했듯이, 우리나라도 한강, 낙동강, 금강 등의 강 유역이 사람들이 그 지역에 정착하는데 기여했다. 또 우물과 같이 물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은 한 마을이 생겨나는데 기여할뿐만 아니라, 우물가는 마을 사람들이 만나고 교류하며 마을의 이야기를 나누는 광장이기도 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 초반부 평사리에가 배경일 때, '우물'이 종종 언급된다.

특히 마을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거나 물을 긷거나 할 때 우물가에 모여서 마을의 소문을 이야기한다. 소설에서는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우물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등,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했을 것이다.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장소를 넘어, 공동체의 삶과 연결된 중요한 공간임을 보여준다.
김홍도 <우물가>, 우물가 여론은 곧 민심이었다.


이제는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오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상수도 보급률 99.4%(20222)로 세계적으로도 수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높고 깨끗한 물을 이용하는데 선진적인 나라다. 즉 물이라는 자원으로 지역사회나 공동체가 유지되는 시대는 버얼써 옛날이 됐다는 이야기이다. 이쯤돼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그럼 이제 우리를 한 지역사회에서 교류하게 만드는 광장은 무엇이 있을까?'이다.




앞서 '우물'을 예시로 마을의 광장을 이야기했지만, 한 지역사회에는 여러 형태의 광장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정자나 마당이 광장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고, 유럽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을 중앙의 성당 광장 등에서 사람들의 모임과 상호작용을 촉진하며 공동체 생활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역할을 해왔다. 그렇지만 변화된 현대사회의 여러 모습들은 우리로 하여금 살고있는 지역에서의 광장 참여에 의문을 품게한다.

1. 굳이 광장이 나가지 않아도 디지털 기기나 SNS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다.
2. 안그래도 바쁜 생활 패턴은 여유를 가지고 지역의 광장에 참여하기 보다 개인적인 취미나 가족 등에만 몰입하게 된다.
3. 쇼핑몰이나 카페 등의 공간이 생활반경 곳곳이 생겨나며 전통적인 광장의 역할이 줄어들며 필요성에 의문이 들게 됐다.
4. 우리는 점차 개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광장에서의 열린 만남보다, 밀실에서의 개인적인 시간을 더 선호하고 있다.

이런 점들이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 '이웃', '공동체 구성원' 등과의 일상적인 교류를 줄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역사회의 사람들 간 교류가 점차 줄어드는데는 공공의 자원으로 만든 장소가 줄어드는 것도 영향이 있다.

토지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이동진이라는 양반이 나오는데, 그의 집에 따로 우물이 있다. 양반이라는 명분과 많은 재산으로 집에 별도로 우물을 파서 이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동진은 공용 우물을 어지럽히는 행동을 한 게 아니었다. 그의 우물은 그저 자신의 집안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이지, 공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던 마을의 우물을 사유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에 당연히 함께 이용했던 '공적인 서비스로서의 광장'이 상업화나 사유화, 주차장 등과 같은 다른 서비스로 변질되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원래는 이런 곳에서 자연스럽게 교류와 소통이 이뤄지고는 했는데, 그런 기능이 도시에서 삭제되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 영국 YMCA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10년 이래로 영국의 모든 지역에서 청소년 관련 예산이 60% 이상 줄어들었고, 4,500개 이상의 청소년 일자리가 사라졌으며, 760개의 청소년 센터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외에도 지역의 노래 공연장은 계속 문을 닫고 있고, 도시의 광장이나 스케이트 공원 같은 곳들은 CCTV와 경비원의 단속으로 사람들을 선별해서 들어오게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자료 : 기호신문)

위 기사를 취재한 기자는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콘크리트 건물과 매연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체육 과목은 뒷전으로 한 채 입시와 야간 자율 학습, 학원 생활을 반복하는 한국 청소년이 그나마 즐길 수 있는 여가는 게임이다." 이제 청소년들에게 그나마 열린 광장은 가상공간이 된 것이다. 한 때 친구들과 동네 곳곳을 뛰어다니며 놀던 기성세대가 미안할뿐이다. (더 참고할 수 있는 글 : 사라지는 우리의 장소들)


물론 긍정적인 사례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경의선 숲길이 있다. 용산선 폐철길을 공원으로 탈바꿈해 6.3km 길이의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주변이 상업화 되었지만, 이 공간을 상업화에 중점을 두고 개발할수도 있었겠지만, 시민들에게 공원으로 돌려준 것이다. 부족한 녹지를 도시 공간에 구성한 것도 좋았지만, '늘장, 땡땡거리마켓, 와우교친환경문예운동, 책거리' 같은 단기 행사가 자주 주최되며 시민들의 광장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경의선숲길 연남동 2구간 전망, 사실 저렇게 비어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많은 시민들에게 좋은 공간이 되어준다(자료:한국조경신문)


우리 사회가 아무리 개인화되고, 바쁘고, 만나는 장소가 사라지더라도 '광장에 모이는 인간의 본성'은 남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으로 서로 연결되는 것을 희망한다. 게다가 같은 지역사회의 공동체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광장에서의 교류와 소통이 요구되고 필요하다.

사실 지역사회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이미 여러 방식의 광장이 운영되고 있다.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 등 거주지에 따른 주민회의체, 주민들이 운영하는 주민자치회, 행정이나 여러 단체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주민참여형문제해결 과정 등과 같은 것들인데, 다음 글에서는 이 사례들을 더 자세히 이야기 나눠보겠다.


- 모든 지역사회에는 광장이 있(었)지(2)에서 계속

이전 13화 회사에서 무슨 광장이야?(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