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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Dec 02. 2020

P14 스펀지가 먹은 말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말의 선물>


태어나라 말
내 가슴을 찢고 나와라
무수한 의식을 그냥 지나친 게 아니라
하나의 영혼에 닿는 모습으로 나타나라

이야기해라 말
내 몸을 이용해 나타나라
사라지지 않는 빛을 동반하고
한탄하며 괴로워하는 자에게 다가가라

울려 퍼져라 말
내 영혼을 꿰뚷고 퍼져나가
진정한 기쁨은 깊은 슬픔 끝에 있다는 것을 슬퍼하는 자들에게 알려라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말의 선물》에서 인용



깊은 우물 안으로 돌멩이 하나를 던져보라. 한참을 기다려야 우물 벽에 부딪히고 튕겨서 시커먼 물 안으로 풍덩 빠져 가라앉는다.  우물 안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은 아득한 소리로 잠시 들렸다 사라진다.


그 우물 속 깊이가 얼마쯤 되는지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서 두레박을 던져보라. 손에 잡았던 두레박 끈이 한없이 풀려나가 우물 아구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겨우 끈의 끄트머리만 남기고 우물 안으로 곤두박질치며 던져진 끈 달린 두레박은 기필코 시퍼런 밑바닥 물을 껴안고 올라온다.


두레박에 매달았던 끈은 우물의 깊이를 아는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당 어디쯤에 우물을 팔 것인지 미리 계획하고 깊이를 어디까지 내릴지도 생각해놨을 거다. 무작정 우물을 팠다가는 수돗가에서 흘려내려 간 물을 우물에서 긷게 되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자기 집 마당에 수맥 자리와 물길을 알지 않고 대충 물만 퍼올리면 된다는 속셈으로 얼렁뚱땅 모양만 우물인걸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


ㅡ 에이스케의 <말의 선물>을 읽고 연상된 그림이 '우물'이었다. 내가 퍼올릴 자리를 잘 찾은 것이긴 한지? 우물에서 끌어올리는 게 산소인지 수소인지 아니면 질소인지 모를 공기만 가득한 빈 두레박인지? 여전히 두레박에 매단 줄이 우물 안으로 곤두박질쳐 하강 중인지?



두 번째. 물 먹은 스펀지가 연상되었다.


엎질러진 말이 아니라 신중하게 한 획을 그으며 호흡했을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진중함이 책 곳곳에 묻어있어서 눈이 가는 곳마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작가의 글은 깨끗하게 닦인 거울이 되어 나를 비췄다. 그게 감사해서 속으로 작가를 존경하는 맘이 들기도 했고, 이 책은 돈을 주고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ㅡ 말을 자신의 도구로 삼는 게 아니라 말과 함께 뭔가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책 150쪽에서 인용


 그게 글 쓰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인생의 태도라고 생각하도록 에이스케가 내게 말해줬다.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철학적 메시지가 담겨있는 책은 진중하지만 무겁지는 않다. 천천히 차분하게 씹어 삼키든지, 아니면 글로 다듬은 그의 말을 스펀지로 빨아 당기든지 해서 나로부터 어떤 말이 내가 되어 나올지를 지켜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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