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삿포로
학교 건물 일부가 정전이 돼서 본의 아니게 출근이 계속 미뤄지는 중이었다. 그러다 이번 주 내내 정전일 거라는 소식을 들은 당일, 바로 삿포로행 비행기와 숙소부터 끊었다. 다음 날과 시설 복구 후 출근 전 사이 시간을 여행으로 보내는 게 지금의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결정했다. 비행기는 어렵지 않았는데, 숙소는 구하기가 어려워서 하루 종일 서칭해서 겨우 구했다. 휴. 이제 3박 4일 동안 여름 삿포로에서 선선하게 걷고 움직이고 오기.
환전은 온라인으로 새벽에 신청한 뒤, 공항에서 당일 수령했고 유심은 어려워서 이심으로 구매 및 설치해서 바로 이용했다. 돼지코를 까먹어서 숙소에서 보증금 걸고 대여했다. 세상이 좋은 건 알았지만, 너무 편리해서 새삼 감사했다. 수속도 무사히 마치고 나서 점심은 공항에서 잘 챙겨 먹었다. 조금 대기 시간이 있었고 이후엔 비행기도 잘 탑승했다. 오, 어제는 대전이었는데 오늘은 인천공항 비행기 내부에 앉아있네 생각하며 들뜬 마음도 들었더랬다. 가는 동안에는 계속 잠이 와서 푹 잤는데 아무래도 전날 숙소 정하느라 고생하고 최소한으로 필요한 걸 새벽부터 준비하느라 피곤했던 게 확 몰려온 것 같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선선한 날씨에 많이 돌아다니는 게 중요했어서 삿포로와 칭다오 중에 고민하다가 더 시원한 날씨인 삿포로로 정했다. 막상 가보니 낮에는 아무리 삿포로라도 더워서 힘들긴 했다. 오전이나 저녁, 밤에는 선선하고 바람도 불어 너무나도 좋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완전한 가을 날씨는 아니었다. 칭다오 갔으면 더워서 큰일 날 뻔. 삿포로라서 적어도 여행의 목적은 이뤘으니 다행이다. 가서 뭐 대단한 걸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잘 먹고 선선한 날씨에 돌아다니고 왔다. 회전초밥, 수프카레, 키노쿠니야 서점, 자전거 타고 홋카이도 대학 돌기, 시코츠 호수 정도. 마지막 날 인천에 들어왔을 때, 후덥지근해서 조금 놀랐다.
키노쿠니야 서점에서 고양이 일러스트가 그려진 노트 하나 사서 끄적이기도 하고, 자전거 타다가 홋카이도 대학에서 키우는 소들도 발견해서 너무 신기했다. 소들이 말처럼 생겼다. 찰칵찰칵. 사진이 남는 거야. 시코츠 호수는 항저우의 서호를 마주한 감격만큼은 아니었지만, 매력 있고 포근하고 예뻤던 것 같다. 삿포로 도심이랑 공항을 속속들이 돌아다닌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던 것도 당연히 좋았고 삿포로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더 잘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서 느끼는 게 많았다.
겨울에 갔을 때는 삿포로 도심보다는 오히려 기차 타고 멀리 갔던 하코다테와 오타루가 기억에 크게 남았었는데, 여름에 와서 보니 삿포로 도심이 이렇게 괜찮은 곳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여행 목적이 다른 것도 있고, 마음이 바뀐 것도 있고. 아니면 그땐 눈에 쌓여있었어서 몰라봤던 건가. 일본 사람들이 서울이나 인천, 대전을 놀러 오면 이런 기분이려나 싶기도 하고. 나에게는 익숙한 공간이, 저들에게는 낯선 공간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내 일상이 타인의 눈에 참 낯설고 좋게 느껴지는 순간을 만들겠구나 싶어 평온한 일상이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행의 이유'라는 김영하 작가님이 쓰신 책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지, 그래서 다들 여행을 가나보다 하면서 공감했던 적이 있었다. 기억나는 거로는 '여행지에는 상처의 흔적이 없다'는 내용이었는데 꽤나 그럴듯한 이유 같아 곱씹어보기도 했었다. 희로애락 삶의 흔적이 가득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여행'이 가고 싶어진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신입학을 앞두고 읽었던 책이었는데, 그 후로 1년의 시간을 보내면서는 그런 합리적인 이유들이 나에겐 퇴색되고 있었다. 나에게 여행보다 중요했던 게 많았기 때문인 듯하다. 학교 다니고, 일하고 돈을 모은다거나 이렇게 글도 쓰고 러닝도 시작하고 그런 것들. 어쩌면 여행에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국내로 가든 해외로 가든 실제로도 여행을 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한 건 맞으니까. 체력도 필요하고 말이다. 국내는 괜찮아도 요 근래에 해외는 마음먹기가 어려웠다.
20대를 나름 치열하게 살았던 내가 이제는 대전에서 원했던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보니 문득 좋은데 참 어색하고, 이걸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열할 줄은 아는데, 마음 놓을 줄은 모르는 그런 건가. 일상을 새로운 시각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게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나자마자 여행도 빠르게 결정하고, 다녀와서 생각이 정리되고 내 나름의 방식도 정할 수 있었다. 다녀와서야 알게 된 게 있다. 어쨌든 항공과 숙소 외에 나머지 일정들은 당일마다 정해서 채워야 했는데 하루를 잘 보내기 위해 ‘찾기’ 시작하는 그거. 그게 너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최소한의 돈과 시간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안에서 행복하게 놀려고 작정하면 충분히 잘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데 만일 마음도 없고, 의미를 찾지 못한다고 하면 아무리 돈과 시간을 투자한 여행이라도 시들하고 불만족한 여행이 된다는 거. 마음에서 찾으려고 하면 뭐라도 보이지만, 마음부터 벽을 세우면 결국 찾긴 어려울 거라는 그런 이야기다. 대전에 있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서 때로는 너무 단조로운가 싶은데 이제는 쓸데없는 걸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은 왜 가는 거냐고 묻는다면? 쓸데없어도 실제로는 꼭 필요해서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냥 가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되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