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자
짧은 일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 건 별 거 없었지만 그래서 평온했다. 내가 있는 곳이 새롭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만한 일이었다. 내가 쓴 70만 원이 아깝지 않군. 학교 정전이 해결되고 나서 출근해 보니 갑자기 나에게 맡겨진 일이 많아졌다. 근무 중의 틈새 시간이 거의 없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일을 해치우고 온다. 가볍게 머리를 쓰는 거라 딱 좋았던 것 같다. 여름 방학 기간에는 학교 행정 처리도 일찍 끝나서 오후 3시면 퇴근한다. 일찍 끝나면 열심히 뭔 가를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실제로는 낮잠을 자게 된다. 매일 그러진 않지만.
2시간 여 자고 나면 다시 기운을 차려서 저녁 먹고 운동을 하러 간다. 더위에 졸린 건가 싶은데 매번 커피를 마실 수는 없으니. 체어 기구에서 근력 키우는 게 힘들기만 했었는데 할 수 있다는 원장님의 격려 한 마디에 겨우 동작을 해내고 나면 그게 또 재밌게 느껴진다. 이어서 바로 러닝하고 돌아오는 것도 뿌듯하고 상쾌했다. 비록 3km지만 말이다. 이렇게 운동을 하고 온 날은 숙면하게 되고 다음 날 알람을 듣고 일찍 깬다.
쉬는 날에는 잘 치우고 빨래하고 나서 깨끗해진 방에서 에어컨 틀고 고요히 멍 때리는 것도 너무 좋더라. 근처에 좋아하는 카페가 하나 더 생겨 미리 금액권을 끊어두고 공부나 책 읽고 싶을 때 다녀오기도 한다. 커피를 좋아하지 디저트를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여기는 좀 맛있어서 가끔 간다. 사실 이런 땡볕이 가득한 여름 날씨에는 시원한 카페를 안 가기가 어려운 듯하다. 카페인이 들어가면 잠이 새벽이 되어서야 오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는 하는데 필요한 날도 있다. 대전이 7월 초에 정말 더워서 땡볕에서 힘들었는데 이제는 비도 오고 하면서 날씨가 괜찮아졌다.
집 주변에 맛집도 많았는데 잘 못 간 거 같아서 동기들이랑 가거나 혼자 가기도 하면서 도장 깨기 중이다. 양식집, 일식집, 보쌈집 등등. 특히 웨이팅 해서 갔던 시원한 소바집이 정말 미쳤었다. 동기들이랑 오랜만에 PC방에서 만나 게임을 하기도. 오래는 못하겠어. 영화는 너무 비싸져서 밖에서 보기보다 OTT를 이용하기는 하는데, 액션영화더라도 2시간 동안 너무 정적으로 느껴져서 요즘은 쉽지 않다. 집중력이 떨어졌다. 차라리 드라마가 나은 것 같다. 틀어만 두고 딴 거 하기.
어제는 교보문고에 다녀왔는데, 사람이 정말 많았다. 헉. 비가 소나기처럼 온다는 날씨 예보에도 다들 밖에 나와서 문화생활에 진심이구나 싶어서 웃음이 났다. 나도 그렇지 뭐. 앉을자리가 없어서 서서 딱 1권 다 읽고 나왔다. 읽고 싶었던 다른 3권은 일단 메모해 두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장해서 여러 번 읽고 싶은 책들만 사는 편이므로. 마음은 교보문고인데, 실제로 교보문고까지 가기 귀찮을 때는 할 게 없어서 난감해하다가 넷플릭스로 빠지게 된다. 허허. 그럴 수도 있지. 그렇지만 최근엔 소장하던 책을 다시 읽어보았다. 과학 관련 책이라 한 번에 쭉 읽기는 어려웠다. 2일에 걸쳐 꼼꼼히 읽기도 하고 게 중에서도 읽기 싫은 부분은 맥락만 알고 적당히 스킵.
김상욱 교수님의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이다. 다시 읽어보니 내가 알던 맥락에서도 여전히 울림을 주고, 보이지 않던 것들도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동안 이 브런치북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에 연재했던 우주와 별에 대한 이야기, 인간의 미래 예측, 전기로 움직이는 사람들, 에너지 이야기, 관성 이야기 등과 비슷한 맥락이 나올 때면 머리가 끄덕여졌다. 처음에 물리학을 재밌게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교수님 덕분이기도 했으므로.
우주엔 인간이 생각하는 의미는 없다고 한다.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감정적인 일이 아니며 의미 없이 법칙에 따라 그냥 도는 것뿐이라는.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라는 것. 비록 의미라는 게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더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라는 것.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라는 것.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고 한다.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로운 이유.
그렇구나, 내가 썼던 물리학, 지구과학, 생물학이나 신경과학과 같은 이야기들. 어쨌든 때로는 법칙과도 같은 이 일들은 사실 그렇게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사람이 '의미 부여'를 함으로써 그걸 좋아하게 되고 신기하고 재밌다고 느끼는 거구나. 하긴 그렇지 않았으면 과학이 이렇게 발전하진 않았겠지. 한편으로는, 나의 요즘 '뽀로로' 같은 생활도 행복하려고 시도하는 것들도 내가 사람이기에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의미 부여인 건가 싶었다.
근대철학을 연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고 했다. 충분한 의심을 하고 실험들을 거친 후, 법칙이라는 신뢰가 주어진다고 한다. 지구는 타원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돈다라는 법칙이 있다. 누구라도 망원경을 통해 관찰하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해야 하며, 시대를 따라서도 안된다. 이처럼 과학은 이론의 옳고 그름을 물질적 증거에만 의존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한다.
즉, 과학에서는 증거가 부족하면 "모른다"라고 해야 하는 거라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와 안다고 할 때 증거를 들어 설명하는 태도를 과학적 태도라고 말한다고. 다른 말로는, 아직 법칙이 정립되지 않았을 때 그러한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 한다. 지금은 불확실하지만 수많은 실험과 시도 끝에 어떠한 법칙을 정립해 나가는 것. 하지만 그 법칙조차 다른 누군가에 의해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냥 살아남기엔 위험이 도사리는 것 같다. 지구는 타원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돈다는 법칙도 그렇게 오랜 시간 끝에 정립되었다. 끝없는 연구와 토의 끝에 살아남은 법칙. 뉴턴의 고전역학이 깨지고 현대에 양자역학이 새로 나타난 경우도 있지 않은가.
과학은 정확한 예측을 해낸다고 많이들 알고 있지만, 이보다 중요한 과학의 힘은 잘 보이지 않던 불확실성의 인정이라는 거였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불확실을 인내하고, 계속해서 시도하고 실험하는 일들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일들이 선행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아는 법칙이 정립되고 우리의 삶에 이로움을 준다고 생각하니 괴롭더라도 멋있는 과정인 듯하다. 과학자들이 종종 괴팍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겸손한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 그래서인 게 아닐까. 인내를 아는 사람들. 나는 아직 멀었다. 하하.
이 북을 처음 열 때, 나는 과학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론적으로는 그 의미도 내가 정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학도, 물리치료라는 것도 말이다. 물론 살아가는 것에서도. 그래서 이 글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는 마무리하려고 한다. 예상보다 일찍 끝내긴 하지만 그렇게 멀지 않은 시기에 다른 북을 열 수도 있고, 매거진을 이어서 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끝.
p.s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고, 다음 주도 행복한 한 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