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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Aug 16. 2020

다시 돌아 매트

매트 위와 아래에서 만난 삶

  초등학교 때 집에서 방 정리를 하다가 엄마가 사두셨던 요가 책과 CD, 비디오를 발견한 것이 요가와의 첫 만남이었다. 흥미롭긴 했지만 더 재미있는 다른 세상이 많았다. 10대에 취미로 발레, 한국무용을 접했고 중학생일 때는 피겨 여신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보며 유연하고 단단한 몸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무용학원에서 백조들 사이에 낀 병아리 마냥 짧은 팔다리로 음악에 맞추어 움직이는 시간이 참 행복했다. 무용수나 피겨선수 특유의 몸에 밴 우아함과 아우라를 나도 갖고 싶었다. 무용학원에 가면 본격적으로 무용을 배우기 전에 몸풀기를 했다. 요가 책에 나와있는 양다리를 좌우로 넓게 벌린 박쥐 자세 같은 것들,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 숙여내는 것 같은 것들, 앞 뒤로 찢는 스플릿, 파닥파닥 나비 자세 등등 요가는 그런 스트레칭 혹은 몸풀기 자세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발레나 한국무용만큼 재밌지는 않다고 느껴졌다.


  책이나 CD를 보며 가끔 몸풀기, 스트레칭과 같은 요가를 하다 처음으로 요가원에 등록했던 것은 스무 살 가을 무렵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요가의 세계에 들어가기 1년 전에 나는 헬스장에 먼저 등록했다.


  19살에서 20살이 되던 겨울,  나는 개강 여신을 꿈꾸는 예비대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찐 살을 빼고 46KG을 달성해서 새내기가 되어야지! 부푼 꿈을 안고 헬스장을 등록했다. 헬스장에서 반나절을 거의 살다시피 했다. 스트레칭-워밍업 싸이클/러닝머신-근력운동-유산소운동의 루틴과 식단을 지켰다. PT가 없는 날도 열심히 나와서 운동했다. 다이어트는 성공적이었다. 닭가슴살과 방울토마토와 단백질쉐이크와 헬스로 나는 몇 개월 만에 52-3KG 에서 46KG 이 되었다. 희미한 11자 복근과 태어나서 처음으로 약간 여리여리한 느낌의 몸의 형태를 거울 속에서 자주 만났다. 개강 여신은 잘 모르겠지만 스스로 퍽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푸릇푸릇한 대학생이 되었다. 신나게 술을 마시러 다녔다. 또 거의 매일 같이 구두를 신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치지도 않을 기타와 하지도 않을 공부를 위해 전공서적과 기타도 착실하게 메고 다녔다. 풀메이크업과 수정 화장을 위한 파우치에는 기초제품부터 갖가지 립 제품과 새로 사 본 쉐도우에 마스카라까지 꽉 차있었다. 몇 가지 필기구와 공책, 무거운 책, 다이어리, 이어폰, 지갑 등등등이 담긴 도라에몽 가방을 메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다음 날 아침까지 학교와 학교 바깥, 부산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학교 수업은 자체 휴강해도 매일 집 밖에 나갔다. 지칠 줄을 몰랐다.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고 대학이 아주 재밌지는 않았지만 대학생의 삶은 자유로웠다.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부푼 꿈을 안고 공연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모두 열심히 보러 다녔다. 프랑스도, 서울도 못 가게 되었으니 부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자는 대단한 포부를 세웠다. 놀기도 정말 열심히 놀았다. 욕심이 가득했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렇게 스무 살 여름에는 공연을 하나 만들었고 가을과 겨울에는 연극에 매진했다.


  요가원에 등록했던 것은 처음 헬스장을 등록한 것으로부터 거의 1년이 지난 스무 살 가을과 겨울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파트에서 나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있는 은행 바로 옆 건물 2층에 있었다. 매일 학교 가던 버스 안에서 봤던 건물이었다. 다시 살이 오르기 시작해서 찐 살을 빼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등록했지만 등록하고 나서도 요가원에 갈 시간이 없었다.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나는 24시간으로는 하루가 너무도 부족했다. 학교도 다니고 중앙동아리도 2개나 하고 그 와중에 연애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영화도 연극도 보러 다니고 운동도 하느라 잠잘 시간도 없었다. 밤새 나눌 이야기와 만날 사람이 가득했다. 세상 전체가 내 놀이터이자 학교였다. 요가도 놀이 중에 하나였다. 간헐적 수련을 했다. 내킬 때마다, 몸이 찌뿌둥할 때마다, 내가 아는 선에서 아주 조금 또 가끔씩만 매트 위에 올라섰다.


  다시 매트 위에 올라서게 된 것은 21살의 봄이었다. 몸이 이상했다. 허리가 아파서 의자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고 걸어 다니기도 불편했다. 누워도 아팠다.  발목도 자꾸만 아프고 목도 아픈데다가 잠도 안 왔다. 2학년 1학기를 다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병원에 갔다. 정형외과, 영상의학과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척추측만과 역 C자에 가까운 거북목 그리고 경미한 디스크 증세가 있다고 설명을 해주셨다. 한의원에도 갔다. 세 의사 선생님들의 공통된 소견은 지금 상태에서 더 악화되면 앞으로 평생 고생할 것이니 생활습관을 바꾸고 재활운동과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하셨다. 덧붙여 스무 살이니 몇 달만 재활에 매진하면 좋아질 거라고,  몸도 마음도 사실 많이 지쳐있었던 나는 휴학을 결정했다. 구두를 벗고 매일 운동화를 신었다. 다시 요가원에 등록했다. 필라테스도 등록을 했다. 집에서 밥을 먹고 병원을 착실히 다니고 요가를 하고 필라테스를 했다.


  의사 선생님들의 말씀은 꼭 맞았다. 여전히 발목이 약하고 목이 자주 뻐근하긴 해도 앉지도 눕지도 걷지도 못할 상태에서 나는 금방 벗어났다. 몇 달만에 다시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 휴학생이라 시간이 많았고 조명 공부에 매진하고 무거운 조명기구를 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맨발로 극장을 뛰어다녔다. 나의 휴학은 3학기, 1년 반 동안 지속되었고 그동안 나는 계속해서 연극을 하면서 학교를 가지 않는 시간에 요가원에 갔다. 매일 갈 때도 있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갈 때도 있었지만 자주 매트 위에 올라섰고 서서히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요가 수련을 진지하게 해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집에 있던 몇 권의 요가 서적들과 배우 훈련법을 공부하면서 무대감독을 맡았을 때는 작품 인원들에게 같이 요가를 하자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배우 호흡 훈련과 스트레칭과 근력운동 그 어디쯤에 나의 첫 요가 수업이 있었지만 그것도 나름의 요가였을 것이다. 나의 어설픈 요가 수업과 병원에서 배웠던 재활 운동, 헬스장에서 배운 근력 운동, 책에서 배운 배우 훈련 호흡 발성 훈련의 자료를 공유하고 함께 하는 시간에 모두들 잘 따라와 주었고 나는 그 작품에서 썩 훌륭한 무대감독은 아니었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던 배우 훈련과 체조 발성 시간을 조금 더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게 전문성 있게 진행될 공부가 필요하다는 확신이 드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요가강사가 되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그때 처음으로 잠깐 해보았다.


  몸에 있어서 다이어트와 재활의 측면에서 확실히 헬스나 맨 몸 근력운동, 필라테스가 빠른 효과를 보였지만 필라테스도 요가에서 따온 부분이 있다고 하고 수천 년이나 이어졌다는 요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요가는 무엇인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궁금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간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지금처럼 매일 같이 매트 위에 올라서게 된 것은 스물세 살 때부터이다. 이제는 몸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났고 며칠 씩 잠을 못 잤고 갑자기 심장이 두근 대거나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고 기분이 너무 자주 오르락내리락했다. 요가원에 가면 왠지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매일매일 매트 위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요가 수련도 이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몸과 숨이 떨어져 있었는데 매트 위에만 서면 연결되었다. 숨 쉬는 것을 까먹고 살다가 1시간 움직이면 숨이 쉬어졌다. 사바사나(송장 자세, 시체 자세)에서는 자주 눈물이 났다.


플라잉 요가, 빈야사 요가, 레스토러티브 요가가 제일 좋았다. 매일 매트 위에 올라서고 몸과 숨이 조금씩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무언가 삶에서 끊어져있던 부분들도 연결된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어릴 적 백조들 사이의 행복한 병아리 같은 기분도 다시 느끼며 자주 요가원에 갔다. 연극도 영화도 해볼만큼 해봤다 싶은 마음이 들었던 해에 나는 2개의 요가강사 TTC를 등록하고 수료했다.


  요가강사가 되고 나서도 수련자로서는 방황했다. '내가 요가강사라고?' 자격증을 서너 개 갖고 있어도 확신이 없었다. 해부학 공부를 해봐도 요가 선생님들의 교과서, 요가 디피카를 들여다보아도 와 닿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매일 매트에 서는 것이 힘들었다. 영화 제작 실습을 모두 마치고 떠난 제주에서 만난 초록 매트 위에서의 수련, 하타요가를 만나며 시퀀스를 짜는 것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내 삶과 요가 수련이 그제야 비로소 정말로 연결이 되었다고 느꼈다.

   

이제는 매일 매트 위에서 선다. 하루도 빠짐없이.

요가를 수련하고 요가를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


  여전히 요가원에 등록하고도 결석하기 일쑤인 학생이지만 요가원에 가지 않은 날은 수업 전에 1시간씩 미리 가서 수련을 한다. 요가 수업에 오는 분들께 좋은 에너지로 연결되고 싶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 늘 매트 위로 올라선 지난 7년 간의 매트 안에서의 이야기와 매트 바깥에서의 삶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 내 보려고 한다. 매트 위와 아래, 매트 안과 바깥의 세상과 삶은 떨어진 것 같지만 하나이다. 하나이지만 따로 떨어진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병아리 수련자이자 선생님 그리고 8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한 청년으로서의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내 보려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이 에세이도 어딘가에 연결될 것이라 믿으며,


이 글을 읽는 그대가

이 순간 부디 평안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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