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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r 30. 2020

1차 세계대전 판 <그래비티>랄까, <1917>


*보통은 개봉중인 영화는 스포일러 때문에 구체적인 스토리 언급은 피하는 편입니다만 관객이 더 늘 것 같지는 않아 중요한 스포일러가 아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한 뒤에 읽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1917>이 오스카상을 타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래비티>와 <더 레버넌트>, 그리고 <버드맨>을 연상시키는 여러 특성들 때문에 영화 자체의 고유성이 부족하다. 기술적으로나 전쟁의 스펙터클로나 훌륭한 영화이지만 영화의 내러티브가 부족하다는 점은 여러곳에서 지적받은 바, 그러니까...이 영화가 아니면 다시 볼 수 없는 성취일까?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점.


 특히 영화의 전반부-중반부까지는 <그래비티>와 상당히 유사하다. 주인공의 특성을 보완하는 다른 캐릭터가 등장하고, 사망한다. 주인공은 여러 스테이지를 이동하며 생존싸움을 벌인다. 후반부에 사망한 동료캐릭터가 주인공의 중요한 행동동기가 된다. 영상미학적으론 <더 레버넌트>가 떠오른다. 나무를 활용한 안식의 메타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는 연출이 두어번 반복된다. 모든 씬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촬영해 연출한 기법면에선 버드맨이 인용되지만, 영화의 연출면으론 이쪽이 오히려 타당하기 때문에 매우 적절한 기법 활용으로 보인다. 


 다만 주인공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의 관점에 집중한 연출이 영화에서 성취로만 작용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3인칭으로 주인공들을 따르는 연출이기 때문에 전쟁의 복합적인 측면을 보여주지 못하고, 도리어 긴장이 반감되는 측면이 있다. 이것이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작중 계속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시체들인데, 이 무고하고 무구한 죽음들을 주인공들이 대하는 관점이 상당히 건조하다. 이미 수년간 전쟁을 겪으며 심신은 닳고 닳았고 게다가 초반에 이들이 헤치고 가는 전쟁이 참호전이 한창 진행중인 최전선이라 어차피 시체들은 널부러져 있고, 그 속을 최고조의 긴장 속에서 뚫고 가야 하는 초반이야...이런 연출이 납득이 가지만, 후반부에 스코필드가 민간인 시체들이 즐비한 곳을 혼자서 기어서 가는 장면이 있는데도 이 장면에서의 충격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 


 독일군들이 도시를 점령하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을 대량학살했다. 그 시체들은 강가에 버려져 둑을 이뤘다. 주인공이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나 물에서 기어 올라가는데 그 시체들 위를 기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 장면마저 지금까지와 일관된 연출로 훅 스쳐지나가고 그저 시체밭을 지나고 나서 완전히 멘붕해서 짧게 통곡하는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장면에선 카메라를 공중에서 아래로 넓게 비춰 시체 밭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여줬다가, 다시 클로즈업해서 주인공과 최대한 시선을 일치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주인공에게 집중하는 서사와 연출이 전쟁의 긴장감을 최대한 유지시켰지만 정작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톤이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점도 아쉽다. 이점은 놀란의 <덩케르크>와 크게 대비되는 점인데, 크게 세 장면을 교차편집해서 전쟁의 다양한 국면을 조명함으로써 전쟁의 큰 물결에 그저 쓸려갈 수 밖에 없는 병사들의 긴장감을 더욱 살렸다면, <1917>에서는 스코필드의 시선에 오로지 집중해 따라가는 서사로 인하여 전쟁의 긴박감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고, 이 점은 데본셔 연대의 돌격 장면을 제외하면 후반부를 전체적으로 상당히 느슨하게 한다. 


 주인공 스코필드는 총 하나로 독일군이 잠복하고 있는 지대를 뚫고 갈 수 있는 살육병기도 아니고,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영화의 주제 또한 전쟁영웅의 활약상보다는 전쟁의 무상함과 다양한 인간들의 생존의 욕구였다는 점에서 후반부의 느슨한 연출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바지만, 긴장을 조이고 푸는 세련된 연출력 없이 그저 건조하고 논리적으로 내러티브가 흐르기 때문에 후반부의 카타르시스가 부족해진 것은 크게 아쉬운 점이다. 지나치게 일관된 연출을 고집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혹은, 카메라워크를 횡적으로 넓게 쓰기로 했으면, 종적으로도 넓게 쓰는 정도의 창의력을 발휘해볼 수도 있지 않았었을까싶다. 


 적절한 기술과 연출로 1차 세계대전의 한 국면을 디테일하게 체험시켜준 영화라는 점, 그리고 훌륭한 영상미와 영화음악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이 영화가 이룬 성취가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 배우들의 성찬이었다는 점은 정말 즐거웠지만, 어느 순간 몰입이 깨지고 느슨해진 후반부에 실망하다가 최후의 질주를 제대로 맛보지 못했으니 이를 어쩔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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