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조건

독후감

by 공존

1.
물컵이 하나 있다고 하자. 물컵과 우리의 관계는 물을 붓고, 마시게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마시기 위해서는 물이 차 있어야 한다. 채워지지 않은 물컵은 말할 것도 없이 마실 수 없다.

조금 난이도를 올려보자. "물컵"은 "물을 마신다"는 행위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커피전문점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을 유리창에 그려놓는 것은 이런 상징체계를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기호학이라는 학문에선 "기의(의미)"와 "기표(상징)"이라고 부른다. 지금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한글도 의미와 상징. 우리가 엄지와 검지를 교차해 그리는 하트도 의미와 상징으로 이루어진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지만, 이 말도 해두어야 한다. 그러한 상징체계로 만들어진 가장 고등한 산물 중 하나가 바로 화폐이다. 10원짜리와 5만원짜리 화폐 두종류는 각각의 물질의 가치를 정확히 반영하지 않는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지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바다는 "우미"이고 영어로는 "sea"이다. 이런 각자의 다른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마찬가지로, 구리로 만들어진 동전이 10원의 가치를 부여받은 것과, 종이프린트가 5만원의 가치를 부여받은 것은 본래의 물질적 특성과는 관계가 없다. 각자의 기표에 기의를 부여한 인간의 고도의 작업 - 화폐인쇄도안, 보안장치, 관리체계 - 의 산물인 것이다.

2.
아이에게 부모와 교사는 어떤 존재인가? 기호학을 이용해 표현하자면 학부모와 교사는 "공부와 배움"이라는 기의를 품은 기표다. 우리는 물컵이고, 아이들은 물을 마시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학부모와 교사를 통해서 공부가 무엇인지, 배움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아이들은 감각를 갖추면서, 인지를 형성하면서 배움이라는 평생의 관계를 부모와 맺는다. 그리고 학교라는, "배움"을 위한 공적 공간에서 교사와 아주 길고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아이의 배움은 부모와 교사라는 기표가 보내는 기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부모와 교사는 공부와 배움이라는 기의를 띈 기표로서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는가?

3.
조금 전 화폐 이야기에서 풀어놓았듯이, 화폐라는 기표가 각각의 금액에 해당하는 기의를 부여받는 것은 그것이 조성된 각종 상징체계의 작용이다. 10원짜리 동전은 여백이 많다. 색상을 통해서도 은색보다 낮은 가치로 인식되는 구리의 색이다. 옆면에는 톱니자국이 없다. 10원짜리 동전은 그것을 만드는 생산원가보다도 낮은 가치를 갖고 있다. 5만원짜리를 역시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초정밀한 인쇄도안에 의해서, 특수인쇄기법을 통해서, 금박에 의해서 가치가 부여되고 보장된다. 각각은, 어떻게 기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다른 가치를 지닌 기표가 되는 것이다.

물컵을 한번 보자. 여전히 물컵은 우리에게 물을 마신다는 메세지를 준다. 손을 뻗어, 물을 마신다. 그런데 물이...없다? 기의 전달 실패!

4.
학부모 혹은 교사인 우리는 스스로가 공부와 배움이라는 기표로서 학생에게 적합한 기의를 전달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부해"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올바른 기의라고 말할 수 없다. 비어있는 물컵은 여전히 물을 마시라는 메세지를 던진다. 몇군데 구멍이 뚫린 도안을 지닌 5만원짜리도, 반으로 접고 또 접으면 화폐처럼 보이긴 한다. 마찬가지로, 교사라는 기표가 혹은 학부모라는 기표가 "공부와 배움"이라는 기의를 던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수용자에게 정확하게 수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틀린 상징체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돌려돌려 말하느라 오래 돌아왔다. 교사는 배워야 한다. 학부모는 공부해야 한다. 그것이 학습자 아동을 배움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우리 교육이 다양한 시공간 속에서 학습자들에게 고통을 반복재생산해 주입하고 있는 주요한 원인에 이 학부모와 교사의 잘못된 기표-기의 설정이 있다.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교사, 배우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학부모가 학생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던져도, 그것이 종이 한장을 5만원짜리로 만들려는 고도의 조작적 행위 없이는 학생들에게 전달되지 않는것이다. 그리고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반복은, <SKY캐슬> 드라마가 보여주듯 학습자 아동의 고통으로, 학습의 실패로,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사례가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5.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배움의 조건>이라는 책이 영화와 교육의 만남이라는 책의 꾸밈새에 비해 퍽 어렵기 때문이다. 책은 13가지 영화 - 그중에는 <패치 아담스>나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퍽 친숙한 것도 있고 <천상의 소녀>나 <퍼스트 그레이더>같은 생소한 작품도 있다. - 를 교육학의 다양한 갈래로 엮어내고 있다. <빌리 엘리어트>를 통해서는 계급사회의 산물로서 학습자 아동이 자신의 지위에 고착된 낮은 학습기회만을 부당히 부여받고, 환경적으로 온당히 교육적 처치받지 못하며, 평가에 있어서도 수직계열화된 체계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사례를 말한다. <불을 찾아서>를 통해서는 반복된 연습으로 얻어진 경험이 학습으로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을 고찰하고, 학습의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경이를 포착해 배움은 무엇이고 그것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논의한다. 13가지 영화들이 저마다의 교육적 화두와, 여러 갈래의 교육적 논의로 나아가며 교육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인식의 지평을 양 옆으로 넓히고 천장을 세워 올리고 토대를 깊이 그리고 단단히 한다.

영화의 선정에 있어서 접근성이 높지 않고 (이를 테면 <겨울왕국>같은 선명한 교육적 예시는 책에 담겨있지 않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다!) 다루고 있는 교육이론이 일반적인 교사가 소화하기에도 쉽지 않다. 평균수준의 학력의 학부모라면, 초-중-고 어느 수준이든 책을 읽어내기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학부모든 교사든, 이 책 수준의 교육담론을 읽어내는 것이 바로, <배움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
교사로 학부모들과 대화하면서, 그리고 다른 교사들과 대화하며 느끼는 것은 대부분이 학생 그리고 자녀를 이해하는데 서투르단 점이고, 그리고 그 원인은 스스로의 경험을 토대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히도 우리는 학생에 대해 자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토대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해라 성공해라 이래라 저래라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그런 말 대부분은 훌륭한 가르침이 되지만, 그것이 학습자 아동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나온 가르침이 아니며 "배움"이라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시험에 대비해 일제고사식 시험 몇번을 통과해 우리가 성인의 관문을 몇번 지나치는 것 속에 과연 배움은 몇번이나 발생하는가.

살아온 삶에서 그리고 학습자 아동과의 관계맺음을 통해서 쌓아올려진 직관으로 더 좋은 학부모, 더 좋은 교사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많지만 세상도 그리고 아동의 삶도 우리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은 항상 존재한다. 점차, 그에 대항하는 우리의 행동도 아이와의 대화도 제한되고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학습자 아동이 크나큰 교육의 실패를 떠안고 성인이 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우리는, 이 아이를 길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학부모든 교사이든 나는 배움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것은 전혀 아니다. 난 요리를 통해 심대한 배움의 기회를 갖고 있다. 새로운 메뉴를 배우기 위해 서핑을 하고 쇼핑을 한다. 반복을 통해 실수를 교정한다. 아이와의 대화도 깊이 있는 공부거리다. 교사가 시험문제를 낼 때 "발문"이란 것을 고민하는데, 대화는 바로 그 발문과 경청, 그리고 수용과 협상 등등 아주 많은 고등적 사고행위를 수반한다. 우리의 삶은 배움의 기회로 가득차 있다.

문제는, 그러한 배움의 기회를 나의 것으로 만들어 실천하는 생생한 사례를 학습자 아동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학부모라는 그리고 교사라는 기표가 결절과 공백 없이 "공부와 배움"이라는 기의를 학습자에게 전달하느냐 하는 점이다.

7.
<배움의 조건> 뿐만 아니라, 교육에 관한 너무나 많은 책이 세상에 존재하고, 자신에게 맞는 책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적어도 학습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주어진다. 하루의 일과, 한해의 거동이 아니라 길고 긴 시간을 장으로 하여 우리에겐 배움의 기회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꺼이 우리는 배워야 한다. 학부모인 나, 교사라는 나의 물컵에 물을 채워야 한다. 10원짜리 그것도 허술한 위조지폐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고액권 지폐의 정밀한 도안만큼 우리의 교육철학과 교육사상을 채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모델로 해 배우는 아이들의 <배움의 조건>이다.

이러한 생각을 품고서 이 책을 고른다면, 조금은 어려운 개념과 문장에 처음에는 당황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아이와 대화를 먼저 시작해볼 수도 있다. 아니면 평범하게 영화에 대한 리뷰와 평론을 찾아보는 방법도 있다. 영화를 보고 리뷰를 읽는 즐거움을 잊고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처음에는 어렵고 오래 걸린다. 영화가 내포한 교육적 함의들을 감각하기까진 퍽 오래걸릴 수 있다. 쉬운 영화를 골라보면 어떠한가. <더 리더>같은 영화는 매력적인 배우의 호연과 로맨스가 함께 한다. 액션영화도 있다. 놀랍게도.

당장 얻어지는 것이 없어도 좋다. 그렇게 탐구하고 열중하는 모습을, 아이는 본다. 보고 배운다. 그 순간 나는 배움이란 기의를 충실히 전달하는 기표가 되는 것.

끝으로, 책의 일부를 인용한다.

교육과 함께 보다 나은 교육을 위한 교육적 행위는 오로지 한 개인이 가진 용기가 최대로 발휘되는 상황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빌리가 '윌리엄'이 아닌 '빌리'를 고집하면서, '계집아이'가 아닌 '남자'이면서 발레의 수준을 올릴 수 있었던 용기를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교육에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근거, 교육을 통한 희망은, 빌리가 처한 환경에서처럼, 바로 꽉 막혀 어느 곳 하나 여유로움이란 없어 보이는 교육의 암담함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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