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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n 07. 2021

양말을 내어주는 사이

사소함과 각별함 사이

 날은 청명하고 구름은 잦아들었다. 철원까지 차를 몰자 이내 아침의 티티했던 빛채와는 달리 뽀얗게 푸른 하늘빛이 드러났다. 모처럼 일요일에 집을 나선 보람이 있다. 절대 안정에 눕방만을 고집하던 바깥양반과 오랜만에 외출을 한 것이 헛되지가 않다. 마지막 주말 외출이 언제였더라. 어린이날쯤이었나. 그간은 오로지 태아를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엔 침대에서 완벽한 와식생활을 취해 온 그녀였다. 그런데 오늘 왜 철원이었는가 하면, 금요일에 방영한 펜트하우스 시즌3편의 제 1화 탓. 천서진이 출소해서 납치되 끌려온 장소가 가까운 철원이라, 그간은 내가 아무리 나가서 바람 좀 쏘이자 말을 하고 졸라대도 집에서 눕방만 찍으시던 바깥양반, 드디어 몸을 일으키셨다. 


 철원 내대리에 있는 직탕폭포는 얼핏 차에서 내려서 보았을 때는 규모가 작아서 실망하기 쉽다. 그러나 수량이 풍부한 요즘같은 때 가까이 가서 직접 물보라를 감상하면 꽤나 만족스럽다. 구비구비 시골길 사이를 차를 달려, 나뭇깊이 그늘을 드리운 소로를 따라 내려가서 폭포를 바라보면 더운 여름날이어도 한동안 시원한 감격이 느껴진다. 폭포 바로 아래엔 낚싯대를 드리운 아저씨도 있다. 직탕폭포 주차장 바로 곁엔 펜션도 있고 매운탕과 백숙읖 파는 식당도 있지만 폭포의 경관을 가리진 않아 다행스럽다. 천서진이 다이빙을 한 장소가 어디인지 두리번 거리며 한바퀴를 돌았다. 

 있다. 여기다. 긴가민가 해서 유튜브에서 해당 장면까지 한번 찾아본 다음에 폭포 바로 앞 자리까지 와봤다. 드라마 장면과는 다르게 도로는 그 사이 말끔히 포장되어 있다. 드라마 촬영을 알리는 협조 플랭카드가 몇군데에 걸려있는 것까지 재미나게 확인하며 강을 따라 한적한 길을 잠시 더 걸었다. 물이 탁하고 물살이 거세더니 몇발자국 걸어 모퉁이를 도니 어느덧 잔잔해진 물결이 저 앞에 철교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북한강 상류 이곳저곳이 이런 재미난 지형들이다.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북한이 있고, 철조망에 가로막히고 군부대로 둘러싸인 지역이라 이런 경관들을 찾는 사람도 많지 않고, 그로 인해 발전도 더딘 한적한 길. 다시 올 일이 있긴 하려나 하며 발걸음을 주차장 방향으로 돌린다. 대기열을 걸어놓은 막국수집에 갈 시간도 어느덧 되어간다.


 그런데 바깥양반이 한참 별일 없이 걷다가 계단이 나오고 나서야 갑자기, 발 뒤꿈치가 까졌음을 고백한다. 무슨 일인고 하니 양말을 신지 않고 단화를 신은 채 오랜만에 조금 걸었더니 그만 쓸려 생채기가 난 것이다. 요즘 세상에 잘 겪지 못하는 일이지만 오죽 아프다. 나는 그 자리에 바로 걸터앉아 신발을 벗었다. 바깥양반은 안된다며 웃었지만 내가 양말까지 벗어서 건네주니 싫지는 않은듯 그를 받는다. 


 물론 신발을 내어준 적도 있긴 하다. 언제였더라. 그때도 걷다가 내 신발을 주고 바깥양반 신발을 내가 신었다. 290mm의 내 발이 240mm의 바깥양반의 밑창 위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었지만 다행히 길이 멀지 않아 다시 신발을 바꿔신을 수 있었다. 그땐 그나마 신발이었다지만 이번엔 살결에 닿는 양말이다. 내 발이 무좀이라도 앓았다면 바깥양반도 질색팔색을 할 일이겠지만 다행히도 발병을 앓은 적은 없다.


 흰 양말이 헐렁하게도 바깥양반의 발을 감싸는 꼴이 영락없이 우습다. 몇번 신지 않은 새 양말이라 초등학생들에게 신긴 것처럼 새하얗기만 하다. 내가 자주 신는 회색 양말이 아니어서 또 다행이다. 회색양말을 신고 그 위에 신발을 신겼다면 또 얼마나 꼴이 우스웠을까. 마저 남은 양말까지 끼우고 각자 신발을 신는다. 맨발이 되었지만 이번에도 먼 길은 아니다. 


 덕분에, 모처럼 요즘 드물어진 좌식식당에 맨말로 들어가 바닥에 앉았다. 맨발에 느껴지는 그 서늘한 감촉. 집이 아니면 요즘 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짧게 한두군데를 더 들렀다가 집에 돌아오는 내내 맨발로 운동화를 신고 있다. 길게 걸을 예정이 있었다면 집에 가서 발이 땀으로 범벅되어있었겠다 생각을 하니 우습다. 모두 다 청소년 시기를 지나 겪어보지 않은 일들이다. 나이를 먹었고나. 


 고작 양말을 내주는 되게 시시한 일인데도, 연인이나 부부가 아니면 겪지 못할 일이고 또 즐겁지도 않은 일이라 각별하다. 삶을 꾸며주는 치장들이란 그리 허황될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를 어떻게 재미있게 또 새롭게 마주하느냐의 문제인 것이겠지. 주말에 달리 볼 것도 그닥 없는 철원까지 차를 달려서, 폭포 잠시, 식당 잠시 들러 또 이내 집으로 가고 마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대단한 여흥도 필요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저 양말 한짝 기분좋게 바꾸어 신을 수만 있다면, 삶은 앞으로도 퍽퍽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바깥양반은 돌아오는 차에서 금새 잠에 빠졌고 나는 나른한 여름의 뙤약볕을 차 안에서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운전은 금새 지루해졌지만 이따금 운동화 속 맨발의 생경한 감촉이 상기될 때마다 혼자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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