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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면 솥밥을 한다.

남은 밥은 도시락

by 공존

김용택 시인의 "해가 질 때"라는 시가 있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나무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강에게로 산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질 때, 나무와 산과 강에게로 걸어가는 일은 아름답다 이렇게 이런 시어로 이어지는데, 마지막 연이 절창이라, 내 짧은 글에서 이를 모두 옮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찾아서 읽어볼 테지.


그리하여 나는 해가 질 때 나무에게로 산에게로 강에게로 걸어가는 시인처럼 해가 지면 쌀을 씻는다. 해가 지면 쌀을 씻는 이유는 아침을 하기 위해서일 터다. 해가 지면 나는 쌀을 씻어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리고 해가 뜨면 냉장고에서 꺼내 밥을 짓는데...어라 밤 사이에 콩에 싹이...

인덕션은 참 좋은 발명품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2000년대 하이라이트라는 전기 화구가 처음 주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땐 라면 물 끓이기에도 한참 걸려서, 워크샵을 가서 여럿이서 술을 먹고 해장을 하려고 라면 물을 한 솥을 끓인다고, 한시간 가까이 맹물만 구경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결혼하면서 우리는 인덕션을 장만했고, 최첨단 기기의 수혜를 퍽 누렸다. 이 인덕션이 나에겐 참으로 효자다. 인덕션 위에서 커피도 볶고 튀김도 하고 라구도 만들고 하니.


밥 한공기 분량의 쌀이면 누룽지에 숭늉까지 딱 만들 밥이 된다. 밤 사이 씻어서 불려놓아서 귀리와 현미 보리에 서리태 등등 여러 잡곡이 섞인 밥을 딱 10분 가열하면 솥밥이 완성된다. 어릴 때 압력밥솥에 밥 짓는 법을 배울 적엔 밥솥 옆에 서 쌀 익는 내음을 맡아보는 것으로만 겨우 불을 줄일 타이밍을 알았는데, 지금은 인덕션에 붙은 시간설정 기능 하나로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 밥이 만들어지지 이 아니 좋을 쏘냐. 강불에서 10분. 약불에서 5분. 여기에 누룽지를 제법 만들고 싶다면 강불에 딱 2분만 추가하면 된다.

바깥양반은 최근 밑반찬 릴레이 중인 나에게 콩자반을 요청했다. 좋아하는 밑반찬이라나. 놀랍게도 그 많던 밑반찬도 나는 거진 다 먹어 없앴다. 두부조림은 두번을 해 왕왕 먹고 있고, 가지도 볶고 튀기고 조림에 넣어가며 그 많던 걸 다 해치웠다. 조금 여유가 생긴 차에 역시, 어제 해가 진 김에 콩도 불려놓았다. 쥐눈이 콩과 서리태 반반. 박박 씻어서 냄비 채로 두었다. 아침이 되어 밥을 하며 불린 콩을 끓이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본 레시피엔 25분 가량을 끓이란다. 말한대로 폴폴 콩을 끓이며 거품을 걷어내는 아침. 바깥양반과 아기는 자고 있고, 출근시간은 게으르게 다가온다.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 부친다. 태안에서 사 온 들기름이 이제 1/3정도 남았다. 이전에 엄마가 주신 들기름은 넉넉히 남아있지만, 요즘 들기름 사용량이 좀 된다. 그래서 조만간에 시골 어디 방앗간에서나 들그림이라도 좀 구해와야겠는데, 중국산 말고 국산 들기름으로. 값은 두배지만 이런 것에서라도 사치를 부리지 않으면 사는 게 팍팍하다고 생각을 한다. 음...사소한 사치라고 하기엔 두부도 살짝 비싼, 파주 장단콩으로 만든 건데 한모에 4천원이니까 조금 비싼 편인가. 그런데 워낙 요놈이 맛이 좋은데다가,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하나로마트에서 팔다보니 이것저것 함께 장보며 챙겨오기 좋다.


뭐 그리하여 콩을 끓이며 두부를 부치는 아침. 솥밥의 고소한 내, 콩이 삶아지는 고소한 내, 두부가 부쳐지는 고소한 내까지 두루두루 정겹구만. 어제 설거지를 안하고 자, 불을 보아가며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대강 마치니 밥이 뜸이 다 들었다.한바퀴 휘익 돌려 섞어, 밥공기에 낸다. 원래대로라면 누룽지를 좀 만드는데 오늘은 시간 조절을 좀 해놨더니 누룽지가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 설거지엔 이쪽이 편하기도 하고. 아침이라 바깥양반이 숭늉과 누룽밥을 굳이 찾지 않는 것도 있고. 일전엔, 제주도에서 올라와 처음으로 솥밥을 해놨더니 글쎄, 누룽밥과 숭늉을 혼자서 다 먹어버린 것이다. 세상에나. 그 일 뒤로는 또 바깥양반이 누룽밥을 혼자 독차지 하는 일은 없다. 보통은 밥이 넉넉하고, 내가 마저 먹거나 하지.


그러나 저러나 말이야 솥밥의 고소한 누룽지 내음은 아침에 참 알맞다. 귀찮아서 문제긴 하지만 애초에 귀찮으면 이리 먹고 살진 않을 것이고, 하여 남은 밥은 도시락으로 싸기 위해 찬합에 담는다. 단순해 보이지만 저 밥은 자그마치 세개...아니 두개의 밥이 합쳐진 찬합.

밥살을 모두 차렸다. 김치와 순두부찌개, 멸치볶음을 내고 바깥양반을 부른다. 그 즉시 동백이도 벌떡 일어나 앙앙, 벌써부터 놀아달라고 성화다. 아침마다 이래 차리는 것도 일이지만 밥을 차리는 것보다 아이를 놓고 밥을 먹는 게 더 일이다. 아기는 아빠의 핸드폰을 집어서 물어뜯고, 텀블러를 주니 그것을 물어뜯고, 이것도 물어뜯고 저것도 물어뜯고 하여튼 바쁘다. 그래도 밥을, 꿋꿋하게 아이를 두고 먹는다. 주말에 이틀 내내 붙어서 아이를 보다보면, 정말로 육아란 힘이든 것이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출근해서 이렇게 아이와 떨어져있는 시간이 그나마 한가롭다는 생각. 점심시간이 끝나기 4분 전이지만 말이다.

해야할 일이 남았다. 쇠솥은 매번 밥을 할 때마다 기름으로 길들이기를 해야 한다. 정말. 저어어어엉말 귀찮고 손이 가는 일이지만 바깥양반의 즐거운 한끼를 위해서 솥밥을 포기하기 어렵고, 그래서 번거로운 기름칠도 매번 견뎌야 한다. 지각은 확정된 시간이다. 그러나 솥밥도 포기할 수 없고, 기름칠을 포기할 수도 없다. 후딱, 설거지를 하고 마른 행주로 솥을 닦는다. 음 그 사이에 콩자반도 거의 졸여졌다. 퇴근하고 와서 식으면 담아야지.


그리하여, 분주한 아침은 마무리되고 솥밥은 기름칠 되어 처음처럼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 저녁은 뭘 먹느냐...아마 솥밥을 다시 할 수도. 근데 또 생각해보면, 전기밥솥 나오기 전엔 늘 이렇게 차려주셨지 싶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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