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처음 목욕 후 바나나 우유를 먹을 때.

아내꺼 하나 아이꺼 하나

by 공존

목욕을 끝내고 나는 여탕과 남탕이 갈라지는 입구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나오지 않는다. 기다려도, 나오지않는다. 이러면 보통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걱정에 애가 닳기 시작한다. 20개월 밖에 안된 아이가 목욕탕에 들어갔으니 미끄러운 바닥에 머리가 깨지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자빠졌는데 각진 모서리에 코를 찧기라도 한 것인지.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걱정은 하염없이 늘어간다. 그리고 다리도 아파온다. 나는 서서 기다리다가 이윽고 바닥에 덜퍽 앉았다. 다행히 신발장에 신을 넣고 걸어들어와서 여탕과 남탕이 갈리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어디에 앉아도 딱히 더럽거나, 목욕탕에서 나온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진 않는다. 늦은 시간이라 핸드폰의 배터리도 넉넉하진 않다. 책도 손에 없으니 폰을 하는둥 마는둥 시간은 애매모호하게 흘러간다.


가족휴양지에 온 터라, 목욕탕에서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린 아이를 낀 가족무리다. 머리를 적신 어린 아이들이 다다다 뛰어서 신발장으로 향하는 모습은 사랑스럽기만 하다. 아빠와 나오는 사내아이들, 엄마와 나오는 딸 아이들. 여자 아이라 내가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으니 원, 도울 수가 없다. 처음 아이를 데리고 목욕을 시키는 아내는, 잘 하고 있을까.


"어휴, 말도 마. 얼마나 정신이 없던지."


마침내 30분이 넘는 기다림 끝에 아내가 아이와 나왔다. 20분 정도 샤워를 하고 나오기로 했는데 아내와 아이는 거의 한시간을 채운 셈.


"왜 이렇게 오래걸려?"

"나 씻고 애 씻는 것도 힘든데 얘는 계속 물장난은 하고 싶은데, 샤워꼭지가 물이 알아서 잠기잖아. 그럴 때마다 다시 눌러주느라."

"어휴."

"나 머리에 물기도 못 닦아냈어 계속 안에서 뛰어다녀서."

"빨개벗고?"

"어!"


아이는, 물장난을 좋아한다.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고 그게 씨게 왔다. 오래걸릴만했구나. 가뜩이나 할 게 많은 아내가 애까지 간수하며 씻으려니, 오래 걸릴만했다.


"어, 잠깐만. 여기."

"응?"


나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윗층으로 올라와 마트에 잠시 들어갔다. 해야 할 "국룰"이 있다. 아이의 첫 목욕탕 경험이니, 가장 소소한 행복 역시 세트메뉴로 끼워주어줘야지.


"자."

"어 애기 이거 안먹어-."

"알아. 그래도 이벤트인데."


나는 뚱뚱이 바나나 우유 두개를 사 아내와 아이에게 주었다. 목욕을 하고 나왔으면, 응당 이래야지. 이내 아내는 쪼르르 하고 자기 몫의 바나나우유를 모두 마신다. 그러나 아이는, 한입 먹고 입을 슬 뗀다. 그리고, 한번 더 먹어보라는 아빠의 권유에는 말을 듣지 않고, 빨대를 물고는 숨을 불어 뽀르르 거품만 일으킨다.


원, 녀석.


오늘은, 기념할만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기억은 할 수 없겠지만, 아이는 평생 수십 수백번은 경험하게 될, 인생의 가장 소중하고 달달한 순간을 아주 조금 맛봤다. 처음으로 목욕탕에 가보았고, 처음으로 신나게 물놀이를 하였으며 처음으로 따스한 몸에 시원하고 달달한, 뚱보 바나나 우유를 맛보았다.


삶의 모든 첫걸음. 이 하나하나의 발자국에, 곁에선 아빠와 엄마가 어떤 모습과 어떤 표정을 지어주느냐에 세상은 많이 달라진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행복을 맛본 아이로 만들기 위한 마음도, 그럼에도, 그런 삶을 지탱하기 위해 아이와의 소중한 시간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도 대부분의 사람이 같이 맛본다. 언젠간 바나나 우유 하나도 아이와 다툴 일도 생길 것이고, 딸아이기에, 영영 엄마와만 바나나우유를 먹게 되기도 하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 그 첫걸음을 아빠의 몫으로 남기며 바나나우유를 건냈다. 네가 다 먹지 않고 장난만 치던 바나나우유 역시 나의 것이 되었다.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그것을 넘기며 아장아장 걷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쪼르르 쪼르르 그렇게 바나나우유는 내 마음을 포근히 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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