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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홀릭 Nov 12. 2023

제왕절개 후기 4일 차

초유가 나오다

10월 20일 금요일



어제부터 초유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기가 내 곁에 없는데 몸은 이런 상황을 봐주지 않고, 참 정직했다.

출산을 했으니 초유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상황적으로 모든게 당황스러웠다.

아기는 없는데 젖이 돈다는 것이 나를 더욱더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새벽에 가슴이 너무 아파서 유축을 하는데 진짜 현타가 왔다.

나란 사람도 결국 한낱 동물에 불과하지 않음을, 세상에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기도 곁에 없는데 새벽에 일어나 유축을 하자니 또 눈물이 나왔다.

우유를 먹을 아이가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새벽 내내 마음이 답답하고 한숨이 지어졌다.


내 몸의 새로운 변화는 나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티를 내지 않고 내 곁에서 조용히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날이 밝아왔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캄캄한 순간들이었다.



산부인과 선생님께 아침 회진을 받고 나니 출산 후 처음으로 뭔가가 먹고 싶었다. 유축을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정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고 에너지 소비가 꽤 되는 것 같다.)

출산 내내 입맛이 하나도 없었는데, 스타벅스 라떼가 너무 먹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유축으로 카페인이 든 것은 마실 수가 없었기에 디카페인 라떼를 남편이 사다 주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라떼는 정말 맛있었다.

고작 라떼 한 잔일뿐인데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감정의 충족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과 비례하지 않음을 새삼 또 느꼈다.  



오후가 되어, 신생아 수첩이 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아기를 보러 간 적이 없기에 신생아 수첩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튼튼이의 신생아 수첩이 5층 신생아실에 있다고 하여 수첩을 받으러 갔다.



5층 신생아실 자체를 나와 남편은 처음 가는 것이어서 모든게 낯설었다.

신생아실의 유리창 앞에서 여러 부모들이 자신의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에 또 속상해졌다.



신생아실의 벨을 눌렀더니 간호사가 나왔고 튼튼이의 용품을 챙겨주겠다며 나를 작은 방으로 불렀다.

간호사는 튼튼이의 신생아 수첩과 출산 선물을 나에게 주었다.

원래라면 출산 선물 중 하나인 속싸개를 아이에게 입혀주는데 우리에게는 그냥 가방에 담아 주었다.


튼튼이의 신생아 수첩을 펴보니 아이의 출생 날짜와 시간, 그리고 몸무게와 키가 적혀있었다. 우리 아기가 53cm로 태어난 것은 나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접종 및 검사 내역란은 텅텅 비어있었다. 아기가 태어난 당일에 니큐에 가는 바람에 무엇하나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수첩을 보자니 또 눈물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산후 우울증 같았다.)

내가 자꾸만 눈물을 흘리니 간호사는 나를 안아주며 다독여줬다.



눈물을 닦고 마음을 다잡으며 병실로 들어갔다.

얼른 나부터 굳건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이제는 내 원래 성격대로(?) 개척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다.



저녁 즈음 친한 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언니에게 용기를 내서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말을 할 때는 슬펐지만 다 말하고 나니 너무 후련하고 함께 슬픔을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언니와의 통화에 용기를 얻어 이전까지는 읽지 않았던 지인들의 카톡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


막상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마음이 괜찮아졌다.

지인들은 진심으로 날 걱정해 줬고 아기의 쾌유를 빌어주었다.



슬픔을 나누고 나니 훨씬 편안한 저녁을 보낼 수 있었고, 이 날은 입원 후 가장 깊게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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