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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은 Jan 18. 2021

슬럼프가 찾아왔다면

평범한 일상들이 우리를 나아가게 만든다.

혼자 여행을 한 지 2~3주가 되었을 때쯤 갑자기 슬럼프가 찾아왔다. 일명 ‘여행 슬럼프’라고 불리는 이것은 어느 날 무작정 찾아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밖을 나가는 것을 귀찮게 만들고, 관광을 해도 금방 지루하고 고단하게 만들어 버렸다. 여행을 하면 매일 특별하고 행복한 하루가 반복될 줄 알았는데 여행도 슬럼프가 있다는 게 당황스러웠고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일반 슬럼프와는 다르게 여행은 한정적인 시간이기에 꾸역꾸역 밖을 나가게 만들었다.


그날도 무기력해진 몸을 이끌고 억지로 숙소를 나왔다. 내 컨디션과는 다르게 날씨는 너무 좋았다. 하늘엔 뽀얗고 하얀 구름들이 떠있었고, 내 옆에 있는 길게 펼쳐진 강은 하도 맑아서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수많은 건물들을 물 위로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무작정 걷다 보니 멀리서 산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올라가길래 궁금했던 나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보니 그곳은 미켈란젤로 언덕이었다. 높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계단 앞에 앉아 버스킹 연주를 듣고 있었다. 버스킹 연주자의 뒤로는 피렌체의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니 구름들은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고, 두오모 성당과 주택들은 오목조목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언덕 밑에서 보았을 땐 평범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풍경들이 위에서 바라보니 180도 달라 보였다. 그 모습은 너무 아름다워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천지인데 매번 모른 체 지내 왔겠구나’라고.

지금까지 나에겐 많은 슬럼프가 찾아왔었다. 슬럼프란 ‘자기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저조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일’이라고 한다. 슬럼프가 찾아오면 자괴감에 자주 사로잡히고, 모든 일이 하찮고 재미없게 느껴진다. 슬럼프가 오면 집 밖으로 자주 안 나가게 된다. 하루 종일 집에서 누워있거나, 잠으로 하루를 다 날려 보내기 일쑤다.


내가 그렇게 슬럼프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놓쳤던 걸까. 집 앞을 나서기만 해도 새롭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동안 허무하게 보냈던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여행을 하던 그때, 내가 무기력함에 숙소 밖을 안 나갔다면 소소하고도 아름다운 수많은 일상들을 놓쳤을 것이다.


"한 걸음씩이라도 걷다 보면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 멈춰 서면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노력이란 평범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한 일을 꾸준히 지속하면 분명히 비범한 일이 된다."라는 이케다 다이사쿠의 말처럼 특별한 것이 아닌 평범한 일상들이 우리를 나아가게 만든다.

날씨 좋은 날 한강에 나가 자전거를 타거나, 산을 오르거나, 예쁘게 피어있는 꽃구경을 하는 것 등등 밖을 나서기만 해도 사소하고 잔잔한 행복들이 있다.

한 달간의 여행도 슬럼프가 있는데, 우리의 삶에서는 얼마나 많은 슬럼프가 찾아올까. 이제 찾아온다 해도, 무기력하게 만든다 해도 걱정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자. 그리고 일단 집을 나서보자. 집을 나서기만 해도 우리는 한 단계 극복한 거나 다름없다. 집을 나선 그 이후는 평범한 일상들이 알아서 우리를 치유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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