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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셔레이드 걸
Feb 19. 2023
노견을 돌보는 40대 중반 직장인의 흔한 주말
금요일 오후
급하게 오후반반차를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토요일 아침 9시 반 진료시간을 맞추려면 전날 미리 보리를 픽업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서둘렀지만 집에 도착한
시각은
얼추 5시 반.
가방을 내던진 채 차키를 쥐고 주차장으로 달렸다.
지친 몸으로 다시 집에 돌아와 시간을
보니
어느덧 7시 반.
지난주보다 조금 더 꾀죄죄해진 얼굴과 발을 닦아주고 숨 돌릴 새도 없이 황태국물을 전자레인지에 따끈하게 데워 사료를 말아 밥부터 먹인다.
주변을
둘러
보니 엉망진창이다.
매일 두 번씩 먹어야 하는 갑상선약과 주사기를 꺼내 정리하고 간식을 냉장고에 채운다.
사용했던 수건을 대야에 담가 세제를 풀어둔다.
한숨 돌린 뒤 이제 사람 먹을 저녁상을 차린다.
오늘 새로 올라왔다는 넷플릭스 신작 영화를 틀어놓고 보는 둥 마는 둥 바쁘게 숟가락을 입으로 옮긴다.
대강 정리를 한 뒤 내일 일어나야 하는 시간을 계산해 알람을 맞춰두고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진다.
토요일 오전
8시 반쯤 부스스 일어나 대강 씻고는 얼마 전 새로 산 버킷햇을 푹 눌러쓰면 외출 준비 완료다.
나이를 먹고 시력이 나빠지면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러자 전처럼 거울도 자주 보지 않게 되었고 덕분에 나의 차림새나 남의 차림새에 큰 관심을 갖기 않게 된 건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진료시간에 맞춰 병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접수를 하고 체중을 읊고 이내 호출되어 상담을 받는다.
몇 주 째 속을 썩이던 입 근처의 발진이 꽤 호전되었다.
그 외에는 딱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거의 십 년째 보리를 지켜봐 온 내과원장님(임상의 신!!!)은 중형견치고 열여섯이면 꽤 장수하는 편이라는 말을 또 해주셨다.
언제고 상태가 나빠질 수 있으니 늘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는 말씀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끄덕이고 만다.
최근에 갑상선 기능 저하증 진단을 받은 열네 살 커피의 약까지 짓고 나니 30만 원 가까운 청구서를 받고 카드를 건넨다.
돈이 아깝다거나 뭐 그런 감각조차 무뎌진 지 오래다.
택시 탈 거 버스 타고 굿즈 안 사고 옷, 신발...은 원래 안 사니까 뭐, 뭐든 줄이면 되겠지 싶은 거다.
지난해 말에 수령한 인센티브로 노트북을 사려했는데 귀찮아서 미루다 보니 뭐 이렇게도 충당이 된다.
어쩔 수 없지.
정 급하면 업무용으로 지급된 개인 노트북을 쓰면 된다.
긴축재정의
일환으로 주말 동안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른다.
카트 한가득 짐을 싣고 조수석에 앉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강아지를 달랜 뒤 귀가한다.
다시 얼굴과 발을 닦이고 밥을 주고 약을 먹이고...
이제 한 주 동안 밀린 빨래를 돌릴 시간이다.
수건을 먼저 빨아 널고 다시 옷을 표준 코스로 세탁한다.
3시간을 가까이 빨래와 씨름하는 동안 지친 강아지는 쿨쿨 잔다.
마트에서 사 온 식빵에 잼을 발라 첫끼를 때우고 커피 한 모금으로 숨을 돌린다.
공기청정기가 붉은
빛을 번쩍이며 열일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루가 참 빼곡하다.
일요일 저녁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고 보리의 짐을 챙긴다.
이제 슬슬 엄마집으로 돌려보낼 시간이다.
주말은 어쩌자고 이렇게도 시간이 빨리 지나는 것일까.
아직 이빨도 못 닦이고 귀청소도 못해주었는데.
..
강아지는 사람보다 6배 빠른 시간을 산다고 한다.
주말 48시간 정도를 함께 보냈다 치면 약 12일의 시간이니 보리에게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돌아올 주말까지 5일, 무려 한 달을 더 기다려야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보리를 픽업하러 갈 때마다 나를 깨물고 발로 차며 심통을 부리는 것도
응당
감수해야 하는 루틴 중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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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연구원 A의 단상들
01
우리 집 막내, 하얀 거인
02
노견을 돌보는 40대 중반 직장인의 흔한 주말
03
14세의 에피파니(Epiphany)
04
유난히 길었던 토요일
05
no regret. no, I regret.
계약직 연구원 A의 단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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