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브런치북
계약직 연구원 A의 단상들
01화
실행
신고
라이킷
14
댓글
6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셔레이드 걸
Jun 03. 2020
우리 집 막내, 하얀 거인
하얗고 뾰족한 내 동생, 보리 이야기
“어? 웬일로 칼퇴? 오~ 약속 있나 봐?”
“아... 오늘은 하얀 거인이 오는 날이라...”
“아, 그렇지. 참~ 정성이다, 정성~”
놀리듯 바라보는 선배를 향해 머쓱하게 웃어 보이곤 서둘러 PC의 전원을 끕니다.
매주 금요일이면 저희 집에는 하얀 거인이 주말을 보내러 옵니다.
아, 별명이 그럴 뿐 실제로는 키가 1미터도 되지 않는 우리 집 막내, 보리입니다.
사실 보리는 시골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중형견 크기의 백구입니다.
얼핏 스피츠의 얼굴을 했지만 분홍색 코와 길고 날씬한 다리는 진돗개를 떠올리고 하얗고 풍성한 꼬리는 조상 중에 사모예드가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이보리색의 커다란 귀와 길게 드리워진 하얀 속눈썹 덕에 ‘여우 같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 미견 중의 미견입니다.
아, 조금 팔불출 같았나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근처에서 배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께서 보리를 데리고 오십니다.
그렇게 주말을 집에서 언니들과 보내고 다시 일요일 저녁이면 배밭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분리불안장애가 심각하고 실외 배변 습관 때문에 아무도 없는 낮에는 집에 홀로 둘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주말 반려견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온 가족이 애지중지하는 보리의 생일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 한쪽이 찌르르 해질 때가 있습니다.
전 주인은 치매를 앓으시던 할머니였다고 합니다. 텃밭을 파헤치는 등 매일 말썽을 피워 혼이 나고, 집에 돌아가면 할머니에게 두드려 맞던 게 보리와 보리 엄마의 일상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동네 아저씨들이 어미는 노상에서 잡아먹고 남은 새끼인 보리를 품에 안고 키워줄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어미가 죽임을 당하고 한 끼 식사가 되는 걸 곁에서 지켜본 충격을 쉽사리 잊을 수 있었을까요?
굉장히 심각한 분리불안장애를 가진 보리는 이런 기구한 사연을 갖고 꾀죄죄한 털과 강아지답지 않은 처연한 눈을 한 채 저희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갈이를 하던 개린이 시절인데 눈빛은 노견의 그것이다.
처음엔 구석으로 숨어들고 들고양이처럼 경계가 심했던 보리를 저희 어머니는 늦둥이 막내라도
본듯
살뜰히 보살피셨습니다.
보리는 어머니에 이어 차츰 저와 동생, 아버지에게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수도관이 자연스레 녹아 한두 방울씩 물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아주 감질나게 말이지요.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가족 외에는 전혀 따르지 않을 정도로 경계가 심하고 의심이 많습니다.
한 번의 교통사고와 한 번의 출산, 한 번의 대수술을 겪고 보리도 어느새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앞둔 나이 든 견공이 되었습니다.
특히 최근의 요로결석 수술 후에는 부쩍 체력이 약해져 산책 시간 외에는 잠을 청하는 모습에 개의 시간은 사람과는 다르게, 무척 빠르게 흐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보리와 함께하는 동안 저희 가족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겁이 많아 개를 만지지 못했던 어머니는 보리를 안고 목욕을 시키시는가 하면 집안에 개를 풀어놓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보리와 함께 주무십니다.
보리를 화제로 가족 간의 대화도 많아지고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졌습니다.
특히 제 경우에는 지인들이 염려할 정도로 보리가 없는 일상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말 외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장마·태풍·폭염·혹한·폭설의 악천후와 독감으로 끙끙 앓아누운 와중에도 하루에 두 번 이상 배변 산책을 나서야 했으니까요.
그런 중에 사람들은 놀림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보리는 주인 잘 만나 행복하네- 이제 언니도 언니 행복을 찾아야지,라고 말을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별 것 아닌 것에도 놀라 터질 듯 뛰는 보리의 심장을 안아 달래고 있노라면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안심이 됩니다.
아직도 제가 이 아이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에 말이죠.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신뢰와 애정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빤히 저를 바라보는 눈빛의 주인일 거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대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오늘도 저는 제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하루를 기쁘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편히 잠든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노라면 한편으로 다른 모든 불행한 견공, 유기견, 길냥이, 그 외 학대받는 모든 동물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변에 거위털과 오리털의 공정과정을 알리며 인조털 의류 구매를 권하기도 하고 딱한 사연의 동물 이야기를 SNS로 공유합니다.
적은 금액이나마 동물보호단체에 기부금을 보내고 동물 쇼 금지 운동을 지지합니다.
연말이면 유기되거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모델로 등장하는 예쁜 달력을 구입해 한 해 동안 신세 진 분들에게 선물하는 것 또한 소소한 기쁨이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길어내면 새롭게 채워지는 샘과 같아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지인들 또한 매해 이자가 붙듯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천사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우리의 일관된 애정과 배려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천사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다시 미소 짓게 만드는 것은 감사하게도 우리의 역할이니까요.
흔히들 충성심이 강한 개는 주인을 잊지 못한다고 하지만 저는 차라리 잘 잊어버리는 개이기를 바랍니다.
너무 깊게 각인된 상처 때문에 다시 행복해질 기회마저 놓쳐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부지가 밭일하실 때도 보리는 항상 옆자리다.
언젠가 다가올 이별의 순간에도 이렇게 보리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다소 위안이 됩니다.
먼 훗날, 보리가 제가 없어도 불안해하지 않고 강아지들의 천국에서 목줄 없이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고 즐겁게 지내다 어느 날, 언니의 꿈을 꾸는 밤이면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의 약속처럼 다시 만날 날을 기쁘게 기다려 주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세상에 특별하지 않은 견공은 없습니다.
마치 우리 집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큰 사랑을 주는 하얀 거인, 보리처럼 말입니다.
keyword
반려견
반려동물
공감에세이
Brunch Book
계약직 연구원 A의 단상들
01
우리 집 막내, 하얀 거인
02
노견을 돌보는 40대 중반 직장인의 흔한 주말
03
14세의 에피파니(Epiphany)
04
유난히 길었던 토요일
05
no regret. no, I regret.
계약직 연구원 A의 단상들
셔레이드 걸
brunch book
전체 목차 보기 (총 13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