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동물
처음에 만났던 강사님이 오늘만 일이 있으셔서 새로운 강사님이 오셨다.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새로운 강사님은 괄괄한 성격에 열정이 넘쳤다. 하지만 새벽부터 유쾌한 강사님의 에너지를 우리가 여유롭게 받아쳐주지 못했는데 초급반이라 그런거라고 변명해본다. 우리들은 사뭇 진지했다.
(수영장 국룰인 것 같은) 걸어서 레일을 한 바퀴 돌고 오니 강사님이 키판을 잡고 옆으로 누워서 가게끔 시켰다.
오, 이건 새로운 거다 싶어 신났다.
잘 때도 한쪽으로 누워 자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 자세로 물 위에 떠 있자니 물침대에 누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만, 다른 점은 물침대를 직접 밀며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랄까...? 편한데 편하지만은 않은 그런 특이한 느낌이었다. 강사님은 왼손으로 키판을 잡고 어깨에 귀를 붙여 완전히 눕고 시선은 45도 아래 쪽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처음 해본 것 치곤 의외로 앞으로 잘 나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내 앞 차례 수강생분을 키판으로 툭 치기도 하고 그 분 발에 내가 걸리기도 했다. 그러자 강사님이 나와 앞 수강생 분의 자리를 바꿔주셨다.
몇 번 나와보니 수영장에는 수영장만의 규칙같은 매너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첫 타자로 출발하시는 분이 레일 벽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게끔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예의이자 매너였고, 만약 본인 속도가 느리다면 앞 사람이 먼저 갈 수 있게 순서를 바꿔주는 게 매너였고 이건 매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앞 사람과 부딪힐 것 같으면 그 땐 그냥 키판 잡고 천천히 발장구 치며 앞으로 가고 있으면 된다고 강사님이 말씀해주셨다.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상황에 따라 부딪힐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땐 꾸벅 하고 인사를 하거나 멋쩍게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며 서로 조심했다. 그런데 그게 나에겐 참 아이러니했다. 육지에서는 조금만 부딪혀도 인상부터 써지는데 수영장 안에서는 이렇게나 마음이 너그러워지다니...! 물 안에서는 동지애가 느껴질 정도로 서로를 이해하며 배려했다. 대체 왜 우리는 땅 위에서는 어찌나 그렇게 마음이 조급하고 뾰족해질까. 나부터가 일상생활에서 더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조금 더 풍요로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새벽 감성이라면 뭐, 이것도 새벽 감성이리라. 새벽 6시 15분쯤 되었으니.
레일 끝 부분 즈음 가자 왼쪽 어깨가 아팠다. 아마도 어딘가에 힘이 들어가서던지 아니면 어깨가 좋지 않아 아픈건지 헷갈렸다. 강사님이 다시 레일 한 바퀴를 더 돌게끔 시켰을 땐 어깨가 아프지 않도록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 요리 조리 나름 힘도 빼보고 자세가 이게 맞나 고쳐보기도 했다. 일대일 강습이 아닌지라 내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모두가 한 바퀴 돌고 오자 이번에는 키판 잡고 가다가 한쪽 팔을 돌리면서 호흡하는 것을 시키셨다. 강사님은 사람들이 잘 실수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셨는데 세분화 해서 알려주셔서 이해 하기가 수월했다.
바로, 시선이었는데 즉 고개를 드는 부분이었다. 물 속에 얼굴을 넣었을 때 무의식중에 사람들이 앞을 보려고 한다고 하셨다. 턱을 배쪽으로 당기거나 배꼽을 본다 생각하고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호흡을 하라고 하셨다.
설명을 듣고 그대로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강사님이 내가 자꾸 앞을 보려고 한다고 피드백 해주시며 자세를 잡아 주셨다. 제대로 자세를 잡으니 몸의 느낌이 완전히 달랐고 아까보다도 귀에 물이 훨씬 많이 들어왔다. 거울을 보며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초반에 제대로 된 자세로 길을 들이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하셨다. 기존 강습해주시는 강사님도 수영은 섬세한 운동이라고 하셨는데 같은 맥락이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굉장히 매력 있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르쳐 주신 대로 제대로 자세가 잡힐 때면 간혹 물과 하나가 된 느낌이 들어서 신비롭기도 했다. 아마도 물에 더 익숙해지고 호흡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날에는 인어공주를 꿈꿔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인어공주가 들으면 비웃겠지만.
튜브에 엉덩이가 낀 채 옴짝달싹 못했던 경험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졌음을 느낀다. 비단 그것 뿐이랴. 내가 안된다고 생각했던 한계가 조금씩 깨부숴지고 있음을 느낀다.
즐겨 묵상하는 데미안의 구절이 절로 생각났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나를 포함한 초급반 수강생들은 오늘도 열심히 발버둥을 치며 수린이라는 알에서 나오고자 투쟁했다. (몇 명은 이미 부화한 것 같은 실력이지만)
그럼에도 강습이 끝나고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아 나는 어쩔 수 없는 육지동물이구나하고 중얼거렸다. 두 발바닥에 느껴지는 지면과 아무런 저항 없이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가 이렇게 달콤할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