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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해 May 28. 2022

[k의 기록] 5. 나의 지나온 길에 대하여.

내가 가는 이 길이 길인지 아닌지, 근데 이미 걷고는 있음

지금처럼 제주도 올레길이 유명하지 않던 때, 나는 5박 6일의 여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떠났었다. 인생 다 망한 것 마냥 본가로 돌아와서 '그치만, 난 괜찮아.'를 시전하던 때였고. '일단은 인생의 진리를 찾아볼게.' 하고서 떠난 나름의 순례길이었다.


둘레길이든 올레길이든 무슨 길이든 하여튼 한국의 길들이 이제 막 시작한 단계라 올레길에 대한 정보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촌스럽지만 정성스레 만들어진 홈페이지에 가서 대략의 정보를 훑어보고는 '음 그렇구만 길을 따라 가다보면 주황색 천에 올레길이라 적혀진 이정표가 나온다는거지? .그거 보고 걸으면 된다는거잖아?' 하고 떠났다.


걷고 또 걷고 걷을 수 있게 만들어진 길이라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걷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지금 머물고 있는 본가는 매력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뒷산은 학창시절 이미 수도 없이 올랐었고, 어렸을 때부터 진즉에 탐방을 끝낸 구석 구석의 익숙한 길들이 더이상 어떠한 설렘과 자극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갈 때는 배를 끊었고 올 때는 비행편을 끊었다. 배낭 하나 크게 짊어지고 아침 일찍 바닷길을 올랐다. 꽤 오랜 시간 있어야 해서 책 한권을 챙겼는데 멀미가 나서 보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배 안이 시끄러웠다. 평일인데도 배에 사람이 많았다. 단체로 어디가는 학생들, 섬으로 일하러 가는 건지 아니면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는 코고는 소리가 시끄러운 아저씨들, 선글라스 끼고 하하호호 웃고 있는 대 여섯명의 아주머니들.


배 위 조용한 곳을 찾았지만 그런 곳은 없었다. 있어도 커플들의 안식처. 그나마 찾은 곳이 화장실이었는데 배가 기우뚱 할 때마다 화장실 냄새가 올라와서 내 멀미를 자극했다. 아... 키미테 왜 안 붙였는데... 왜...

멀미 때문에 밥은 걸렀으면서 당이 너무 떨어져서 매점에서 초코바 하나 사서 씹어 먹다가 포기했다. 차라리 바람을 쐬자 싶어 갑판으로 나가서 배가 만들어내는 물길을 내내 관찰하며 죽치고 있다가 밤에 폭죽놀이를 멍하니 구경했다.

'아, 돌아갈 때는 비행기를 끊어서 다행이다.'


울렁이는 바닷길보다는 하늘길이 그나마 낫겠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도 배멀미 때문에 속이 뒤집어져 제대로 자지 못해서 눈이 무거웠다.

단단한 흙길이 그리웠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육지의 단단한 땅을 느끼며 걷자. 그동안 너무 시끄러웠으니까 조용한 곳에서 정처 없이 걷자.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진득하니 생각해보자고 되새겼다.








나는 바다 귀신에 홀린게 분명하다. 아니지, 산 귀신인가? 어쨌든 홀리긴 홀린게 분명하다. 그래, 간밤에 꿈이 이상하긴 했어. 잊고 있던 옛날의 내가 꿈에 나오다니. 기분이 참 묘하게 별로였는데 그래서 그런가봐.


이 혼잣말을 하고 있는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었냐면, 발 밑으로 파도가 철썩 철썩 거리고 컴컴한 바위 틈 사이엔 이상한 벌레가 더덕 더덕 붙어 있는 어떤 바위 위였다.


파도를 사이에    앞에는 거센 물살에 깎인 절벽 바위가 있었고 뒤로는 내가 점프해서 건너와 버린  다른 바위가 있었다.


! 그리고  앞에 있는 절벽 바위,  위에는  뭐가 있었냐면, 바로  핸드폰과 짐이 들어 있는  백팩이 있었다. 누가 저기까지 던졌냐면, 당연히 나지, ...


이야기는 이렇게 거슬러 올라간다. 간밤에 묘한 꿈을 꿔서 기분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묘해진 내가 오늘도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푸르른 들판을 만났고 그 위에서 따사롭게 햇빛을 쬐며 여유롭게 풀을 뜯는 소도 만났고 외 다리(?) 길인데 갑자기 나타나 내 앞을 가로 막는 커다란 말도 봤는데 말 크키와 근육이 엄청나서 그냥 가면 채일 것 같이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싫어서 그냥 한 10분쯤 말이 풀 뜯는 걸 구경했다. 그러고 있으니 다행히 말 주인이 와서 지나갈 수 있었다. 이후에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마지막 장면 같은 그런 나무들 틈 사이에서도 센치하게도 있어 봤다.


한 마디로 꽤 재미있는 길을 걷고 있었고 간 밤의 꿈 따위 알게 뭐람 지금 이렇게 좋은데 하며 콧바람을 흥얼거렸다. 이윽고 바람에 펄럭거리는 주황색의 이정표를 발견해서 들어선 숲길.


그래. 거기서부터 문제였던 거야. 숲길엔 아무도 없었다.

아아아아 너무 좋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리고 바람에 풀이 흔들리는 소리도 들린다.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람 목소리가 안들린다. 자연이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소리야.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을 커다란 나무들이 서늘하게 가려주니 걷기에도 수월하다.


캬, 이거지, 이거.  


그렇게 30분, 한 시간, 그리고 두 시간을 걸었다.


계속 걷다보니 두 시간 반... 두 시간 사십 분... 곧... 이 숲길이 끝나겠지... 그렇고 말고...  울창한 나무에 가려져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이 계속 나왔고 햇빛이 없으니까 추웠다. 그나마 숲을 조금 벗어났나 싶으면 사람 없는 작은 밭에서 스프링쿨러만 애처롭게 달달달 돌아가고 있었다.


밭도 있고 경운기 비스무레 한 것도 있는데 사람... 사람은 없어?


세 시간 째 숲을 걷고 있었다. 밀당 하듯 올레길 이정표가 간간이 나왔다. 제대로 걷고 있다는거지만 기존에 봤던 이정표와는 달리 너덜너덜 헤져 있는 그 천쪼가리가 굉장히 찝찝하게 했다.


네 시간 째 걸었을 때, 앞에 사람 뒷통수가 보였다. 오오- 하면서 다가갔는데 사람 키만한 나무 두 그루였다. 입술이 바짝 바짝 말랐지만 물을 아껴야 할 것 같아서 참았다.

네 시간 삼십 분...아니 사십 분..? 모르겠다.


이제는 아예 나무 그늘에 햇빛 자체가 들어오지 않아 흙이 오랫동안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 같은 길이 나왔다. 여기를 지나는 게 맞을까? 아직 오후 3시 밖에 안 되었는데도 길이 어두웠다. 아아- 아무도 없어요? 소심하게 중얼거려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가자. 그래도 가야지. 여기서 다시 되돌아 가려 해도 최소 4시간은 걸어야 해.  


뒤도 옆도 보지 않고 내가 가야 할 앞길만 보며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뭔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요즘도 산짐승이 나오나? 멧돼지 같은... 그리고-


숲 길이 끝났다. 갑자기 눈을 옥죄듯 달려드는 햇빛에 손으로 하늘을 가렸다. 광채에 익숙해질 무렵 거짓말같이 푸르른 바다, 에메랄드 빛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이 풍경은 내 인생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광경 중 하나로 손 꼽는다.) 미로 같은 숲에 갇혀 불안에 떨던 심리와 육체에 대한 보상을 아주 제대로 받았다.


해방감, 자유로움, 안도감, 설렘, 탐험심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나는 잠시 어깨를 파고들던 무거운 배낭과 신발을 벗어던지고 모래 위에 앉아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발이 발갛게 부어있었다.


내가 여기 왜 왔더라...? 아~~~ 알게 뭐야.

말짱한 영혼을 지나온 숲길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멍하니 에메랄드 빛 바다와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자연이 주는 위로만 주섬주섬 받아들였다.


슬슬 정신이 돌아오면서 저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다시 샘솟을 때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길고 길었던 숲길을 드디어 뒤로 한 채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바다에는 다행히 사람이 있었다. 놀러온 듯 모래 위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 어떤 여자 두 명, 동네 주민처럼 보이는 편한 복장의 아줌마 한 명, 저기 멀리 나처럼 혼자 걷고 있는 검은 등산복의 아저씨 한 명이 보였다. 사람이 있음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다와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너의 길 끝에는 뭐가 있어? 내가 너를 건너서 저 반대쪽 땅으로 가면 인생의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배 위에서 봤던 인위적으로 뿜어져나오는 물길과는 달리 들쭉 날쭉 제각각 철썩 거리는 파도의 결이 나에게 손짓 하며 답했다.


-일단 거기서 너의 여정부터 끝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대답을 해줄 때도, 안해줄 때도 있는 바다한테 하염없이 질문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바닷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 어디서 본 듯한, 화강암인지 현무암인지 커다란 바위들이 바닷길을 끊었내고 있었다. 그 큰 바위들 옆으로는 작은 숲의 입구 같은 것이 있었고 바람에 휘날리는 주황색 천 이정표도 작게 보였다.


나보다 앞서서 걷고 있던 아저씨도 보였는데, 그는 잠시 이정표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왼쪽으로 나 있는 커다란 바위를 타고 빙 둘러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 잘 됐다. 숲길 보다는 탁트인 바다를 보면서 걷고 싶었는데.


잠시 뒤, 나는 아저씨처럼 바위를 타고 있었다. 처음엔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는 것이 수월했다.


그런데 점점 바위와 바위 사이의 간격이 넓어졌다. 나는 껑충 뛰어야 바위를 넘을 수 있었다. 바위 사이로 잔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갈 수 있는 길이니까 아저씨도 갔겠지, 뭐.


아무 생각 없이 읏챠! 하며 뛰었다. 자, 한 번 더 읏챠! 점프! 읏...챠..? 음...? 챠?

가까스로 도달한 넓찍한 바위위에서 숨을 골랐다. 다리가 풀려 무릎에 기대면서도 여기가 길이 맞는지 아닌지 의심을 안했다. 단지 이렇게 험한 길도 올레길에 포함한다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점프해야 할 바위가 넓찍한 바위가 아니라 절벽 바위였다.


그러니까 내 시야보다 더 높은 바위를 올라가야 했는데 거기를 올라가려면 바위 밑으로 나 있는 작은 틈새로 점프를 해서 바위에 매달린 다음에 등반하듯 올라가야했다.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니 굉장히 아슬아슬한 그런 그림.


아우, 당연히 할 수 있지.


본디 젊음이란 어리석음의 자만이라 했던가. 누가 그랬는가? 바로 내가.

...그 때는 지금과 달리 튼튼한 손목과 허벅지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좋아. 우선 이 무거운 배낭을 먼저 던져놓고 가벼워진 몸으로 클라이밍을 훌쩍 하는 거다.

하나, 둘, 셋 끙차! 아아아아악 가방 떨어진다 떨어진다. 어휴... 다행이다.


더 이상 배낭이 미끄러지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나는 내가 가야할 길을 자세히 살펴봤다. 음... 저건 뭐지? 그제야 눈 앞에 광경이 제대로 들어왔는데 햇빛이 없는 바위 틈새에 이상한 벌레들이 다닥 다닥 붙어 있었다.


아~ 그러니까 저기에 내가 손을 대야 한다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잠깐,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비로소 핸드폰이 배낭 속에 있고 나는 뒷 일을 생각도 안하고 배낭을 냅다 집어 던졌다는 현실을 떠올렸다. 그 후 정신을 차린 내가 '아~ 내가 바다귀신에, 아니 숲 귀신에 홀렸나보다. 하하하.' 이러고 있었던 거다.

철썩 철썩. 파도 소리가 발 밑에서 연신 울려댔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서 다시 상황 판단을 하며 바닷속을 들여다 봤다. 내가 앞으로 가기 위해 점프라도 하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게 되면 저깄는 뾰족한 바위에 머리통을 박는거지? 그러면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거고, 그러면 내 시체는 며칠 뒤에 발견이 될까? 신문 기사에는 뭐라고 나올까? [이상한 길을 꾸역 꾸역 가던 멍청이, 길도 아닌 곳에서 생을 마감하다.] 이렇게 실리려나? 아니 한 줄이라도 실릴까? 내 목숨에 그럴만한 가치가 있나?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죽음을 슬퍼해줄까? 조문을 와서 무슨 말을 해줄까?


그 짧은 순간에 흘러간 내 의식의 흐름이었다.


바다야, 너는 나한테 이러면 안되지 않아? 나에게 길을 알려준 거 아니었어?


-철썩 철썩.


바다는 새침하게 모른척 했다. 한 5분 동안 찰싹 찰싹 거리는 파도의 침묵만 들으니 정말 정신이 홀릴 것 같아 벌떡 일어났다.

좋아. 도전이다. 이것은 정말 무모한 도전. 하지만 안하면 안되는 도전. 인생이 그런거 아니겠어?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가더라도 나한테는 처음 가는 길이니까 늘 초행길인거지. 그래서 재밌는거야. 대체 그 아저씨는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나만의 방법으로 이 앞길을 가야해. 가능해. 나 악력 좋아. 매달릴 수 있어. 저 바위 절벽에 충분히 매달릴 수 있어. 할 수 있어.


신발끈을 고쳐 맸다. 두 번 다시 이런 위험한 짓은 안하겠지만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후하후하. 건너편 절벽에 매달리면 그  탄성을 이용해 바위위로 올라가야해. 안그러면 벌레 때문에 내가 놀래서 힘이 빠질 수도 있다. 틈을 주지마 절대로!

좋아! 간다! 하나, 둘, 셋!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건너편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

정말이지, 초인적인 힘이었다. 정말이지, 평소에 손톱을 짧게 자르고 다녀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열 손톱  다 꺾이고 뽑혔다. 정말이지, 키가 큰 편이라 다행이었다. 내 키가 조금만 더 작았으면 바위 위에 발이 안 닿았다. 그랬다면 무조건 그대로 거꾸로 용궁행이었다.


정말이지 정말이지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계속 튀어나왔다.

절벽 위에서 밑을 바라보자 물 속에서 뾰족한 바위가 나를 보고 아찔하게 손을 흔들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시 만난 내 가방을 반가워할 새도 없이 길을 찾아 더듬더듬 나아갔다. 거친 바위 틈새에 의지하며 기다시피 바위를 뺑 둘러갔다. 그 때, 조금 더 위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더 높은 바위를 타고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힘을 내, 여기서 죽기 싫으면...!


"에그머니나!! 어째, 거기서 나온대?"


물질해서 캐온 전복을 손질하고 있던 제주할망이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할망의 대야 앞에는 전복 한마리에 만원이라는 팻말이 있었다.  


"할마니~~~~~~~~~~~ 저 죽을 뻔했어요~~~"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과 비명인지 감탄사인지 모를 목소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처자! 거기는 사람 다니는 길 아니여. 위험하게스리 왜 거기로 갔어! 글루 가면 안돼!"


"어떤 아저씨가 이리로 가길래 따라온건데..."


"뭔 소리여."


"어떤 아저씨 일로 안왔어요?"


"아무도 안 왔어!"


...힝... 뭔데... 아저씨... 뭔데... 귀신이야?


그랬던거야...?


쨘! 저는 이렇게 신기하고도 위험한 경험을 했습니다요!...  로 이 기록을 끝낼거였다면 '검은색의 등산복을 따라가지 마세요.'라는 제목이 붙었을거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제주 할망에게 그 자리에서 전복을 소리내어 팔아주심에 감사(?) 인사를 건네고 (전복 튼실하던데...) 다시 길을 찾아 걸었다. 그런데 얼마 못가 어딘가 눈에 익은 곳이 나와서 또 다시 홀린듯 걸어들어갔다.


바로 간밤에 꾼 꿈에 나온 옛날에 와봤던 그곳. 고등학생 때 갔었던 제주도 수학여행, 노오란 유채꽃이 활짝 펴 있던, 그래서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들렀던 이 곳. 그 곳이 눈 앞에 있었다. 꿈에서 교복을 입고 있던 나는 여기, 제주도의 이 공원에 있었다.


아이 참, 이게 뭐람? 결국 날 여기로 인도하려고 그 먼 길을 빙빙 돌도록 고생 시킨 건가? 검은 등산복을 입은 그 아저씨는 뭔데 그럼. 저승사자야? 아니면 천사야? 뭔가 웃겨서 웃었다.


아, 정말 이게 뭐야?


나한테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그냥 내 어린시절을 포함한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통틀어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는데 그 느낌을 응집한 것들을 그 당시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다시 한 번 느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인생에서 손 꼽는 경험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단지 지금 제주도에 왔기에 꿈의 잔상으로 나온걸까? 단순한 헤프닝이라 넘기기에는 숲에서, 바다에서 너무 큰 고생을 한 다음 마주한 장소였다. 그래서일까. 이 곳에 묻어있는 기억과 향수에 대한 묘한 기시감과 아련함이 몰려왔다. 또 다시 마음이 붕 뜨기 시작했다.


교복을 입은 내가 꿈 속에서 들렀던 데로 공원 화장실을 들러봤다. 어쩜 꿈이랑 이리 구조가 똑같지. 진짜 신기하네. 나는 화장실을 둘러보다가 암벽등반으로 더러워진 손이나 씻자 해서 세면대로 갔다. 꾀죄죄해진 옷의 먼지를 물로 잘  닦아내고 거울을 보며 머리도 정돈했다. 거울 속 내가 지쳐보였다. 꿈 속에서의 나는 어땠더라? 친구랑 대화는 하고 있었지만 슬퍼 보였는데. 웃고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울진 않았던 것 같아.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키가 좀 더 컸고 얼굴은 더 까매졌나? 아주 오랜만에 들여다 본 나의 지난 모습은 꽤 낯설었다.


근데 넌 누구야?


왠지 꿈 속에 있던 교복을 입은 내가 어른이 된 나를 보고 이렇게 물어볼 것만 같았다. 나는 지나온 그 아이를 알지만 그 아이는 나를 모를테니까.


안녕, 난 너의 미래야.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일단은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거울 보고 혼자 그러고 있을라니까 갑자기 무서워져서 서둘러 화장실을 나왔다... ㅋ...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지...


밖으로 나와서 공원을 다시 살폈다. 그 때처럼 노오란 유채꽃이 만발해 있진 않았다. 나는 천천히 다시 걸었다. 지나간 그 시절의 마음을 떠올리며 감상에 충분히 젖어 보려고 했는데 몸뚱아리가 꼬르륵 대는 바람에 밥을 들이키고 그대로 눈에 보이는 찜질방에 들어가 13시간을 꿈도 안꾸고 푹 잤다.








그 뒤, 약 일주일간의 제주도 여행길은 특별한 사고 없이 무사히 끝냈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경험을 다시금 곱씹어 봤지만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시 육지로 돌아와서도 말을 아끼다가 친구들과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가끔씩 이 일을 괴담마냥 꺼내놓았다. 하지만 검은색 등산복 아저씨까지만 말했을 뿐, 꿈 속에 나온 과거의 장소를 만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나만의 질문으로 남겨두고 싶었을 뿐더러 인생의 지나온 길을 떠올린다는 건 늘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 경험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고 내 인생에 어떤식으로 접목해 자양분을 삼아야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기록으로 정리한다.


시간이 흘러 나라는 사람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알고난 후였다.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사는 게 서툴렀던 나는 반짝이는 미래를 꿈꿨지만 어딘가 불안정했다. 충분히 받아들여주지 않은 과거의 마음들은 그림자 같은 잔상으로 남아 가야할 이정표를 가리웠고 나를 뱅뱅 맴돌게 했다. 나아갔다 싶으면 결국엔 제자리걸음이었다.


과거와 현재 그 뫼비우스의 길 위에서 끊어내는 방법을 몰라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어쨌든 걷고 있다는 사실로 위안 삼으면서, 이 길은 나에게 이런 재미와 만족을 준다고 자위하면서.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결국, 또 과거였다.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면 나는 순식간에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상태로 돌아갔다. 소환마법이라도 걸리나 싶을 정도로 늘 과거의 잔상이 불쑥 불쑥 불려나왔다.


그런 경험을 몇 번 더 하고나자 현재의 내가 변하지 않으면 과거도, 미래도 바뀌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오래 걸린 여행이었다.


이제는 지나온 길을 떠올려도 더 이상 아리지도 먹먹하지도 않는다. 또 안개가 낀 것 같이 기분이 붕 뜨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끔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을 때면 여유롭게 과거를 점검하며 현재의 나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의 지나온 길에 대해서 우리는 같이 농담까지 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야, 너 저번에도 그래놓고 이번에도 그러잖아? 그러면 넌 진짜 사람도 아니다.

-응응 나 사람 아니야~

-우리 한 번 더 바위 타볼까?

-미안


어쩌면 인생은,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끊임없이 싸우고 화해하며 미래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지나온 길에 대하여 나만이 보낼 수 있는 찬사를 보낸다.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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