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인간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성장하는 인간
영화 <언 에듀케이션>의 주인공 17살 제니는 옥스퍼드 대학 입학을 꿈꾸는 똘똘한 소녀이다. 그녀는 보수적인 부모의 속박과 틀에 박힌 학교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중년 남성 데이빗을 만나고 그녀의 권태로운 삶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데이빗과 연애하며 제니는 도덕의 굴레를 벗어나 위험한 ‘어른들의 세계’에 눈을 뜬다. 출중한 외모, 말솜씨, 경제력을 겸비한 데이빗은 중년의 능숙함으로 제니를 대하고, 상류층의 기호 – 고급 자동차, 값비싼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명품 선물, 미술품, 파리 여행 등 – 를 동원해 그녀를 유혹한다.
데이빗과 함께한 근사한 어른들의 세계 (정확히는 상류층의 세계) 대비, 제니는 자신이 속해있는 세계 – 평범한 부모와 시시해 보이는 또래 친구들 그리고 맹목적으로 공부만 시키는 학교 – 가 시시해 보인다. 영리한 제니는 굳이 학교에서 힘들게 공부하느니, 자퇴하고 데이빗과 결혼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달콤한 환상도 잠시, 데이빗이 유부남인 것이 들통나면서 제니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녀는 ‘인생에 지름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참회하며 학교로 돌아간다. 한바탕 시련을 겪은 후 성숙해진 제니는 더 이상 앳된 십 대 소녀가 아니다.
비록 유쾌한 결말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녀는 이 경험을 통해 성장했다. 제니는 아마도 천진한 또래 친구들 대비 앞으로 닥칠 인생의 난관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 인간의 대오각성을 이끄는 계기는 일반적으로 학교나 가정에서 제공하는 교육과는 별개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경험은 대개 성공보다는 실패와 관련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이 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따위의 식상한 조언은 종종 청중을 따분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쓰고 있는 황금빛 왕관의 재료가 실패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장이란 무엇인가? 성장은 오늘날 상당히 왜곡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산업화 시대에 접어든 이후, 성장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적 인간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성장은 오로지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한 생산성 증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뜻이다.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직급으로 승진하는지, 얼마나 시험 점수가 올랐는지, 또는 얼마나 효율적으로 자기 계발하는지 따위가 일반적인 성장의 의미로 여겨진다.
성장의 본래적 의미는 인격의 성숙이 되어야 마땅하다. 인격의 성숙은 나이가 듦에 따라 결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받고 싶지 않은 우리 주변의 수많은 미성숙한 어른들을 보라) 스스로 쟁취해야만 한다. 인격이 성숙해지는 과정은 보통 기존의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가령, 일반적으로 부모와 선생은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아이를 길들인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배운 세계가 우주의 전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저 너머의 세계'를 인식하고 기존의 세계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순간이 생기는데 이때가 바로 성장의 출발점이다.
성장하고자 하는 인간은 낯설고 위험해 보이는 ‘저 너머의 세계’를 향해 용감히 발을 내딛는다. 인습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온전히 몸을 내맡길 때 닫혀있던 성장판이 열리기 시작한다. 물론 성장은 필시 성장통을 수반하며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다. 예를 들어,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자는 이를 경험해보지 않은 자들의 비아냥을 들으며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것에 좌절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애벌레가 힘겹게 허물을 벗고 나비로 변신하는 것처럼, 성장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과정일 뿐이다.
성장은 본디 탄생 및 죽음과 궤를 함께 한다. 성장의 과정에서 인간은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맛보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진정으로 위대한 성장은 기존의 자아가 죽어 퇴적되고 그 위에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즉,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던 초기의 원형과는 달리 타인과 구별되는 뚜렷한 개성이 생기고 자아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한편,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성장한 인간의 최종단계를 ‘초인’이라 지칭했다. 그에 따르면, 초인은 군중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실현한다. 초인은 기존 질서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니체는 인간이 동물과 초인의 사이에 존재하며, 모름지기 인간다운 인간이라면 초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는 초인이 되기 위해선 ‘몰락’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몰락은 기존의 자아가 철저히 파괴된 후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것을 뜻한다.
내가 <데미안>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청소년 필독서라 의무감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솔직히 그때는 온전히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아직 어렸기에, 싱클레어처럼 기존의 세계를 파괴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나는 가정과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서서히 ‘저 너머의 세계’로 건너갔고, 나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따금씩 지난날을 돌이키며,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현재의 내 모습에 새삼 놀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낡은 책장에서 <데미안>을 찾아 꺼내 읽는다. 책을 다시 읽으며 경이로움을 느끼고 데미안과 싱클레어, 그리고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고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데미안> 같은 고전의 힘이 아닐까.
<데미안> 소개
주인공 싱클레어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아이다. 부모의 사랑이 넘치는 유복하고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밝은 빛의 세계에 살고 있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속해 있지 않은 저 너머의 음침한 어둠의 세계를 인식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가정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무질서와 폭력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싱클레어가 비교한 두 세계를 보자.
그곳에서는 두 세계가 뒤섞였다. 밤과 낮이 두 극으로부터 나왔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협소해서 사실 그 안에는 내 부모님밖에 없었다. 그 세계는 나도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그 세계에 속하는 것은 온화한 광채, 밝음과 깨끗함이었다. 그곳에는 부드럽고 다정한 이야기들, 깨끗이 닦은 손, 청결한 옷, 좋은 관습이 깃들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침에 찬송가가 불려졌다. 그곳에는 성탄절 잔치가 있었다 ... ...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 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염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가 어둠의 세계를 체험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싱클레어는 불량배 크로머에게 허풍을 떨며 거짓말을 하게 되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크로머의 농간에 시달리는 싱클레어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차마 부모에게 알리지 못한 채 어둠의 세계 속에서 번민한다. 이것은 싱클레어가 겪은 최초의 성장통이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다.
한편, 데미안이 전학을 오고 싱클레어는 그의 묘한 매력에 호감을 느낀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농부들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과 같아 보이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변장한 왕자님' 같다고 묘사하며, 그의 신중하고 성숙한 모습에 매료된다. 둘은 서서히 가까워지는데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어둠의 세계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크로머로부터 싱클레어를 구해낸다.
이것을 계기로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더욱 친해지고, 데미안 특유의 침착함과 사려 깊음에 싱클레어는 상당한 감화를 받는다. 싱클레어의 눈에 데미안은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관이 있는 어른이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싱클레어가 굳게 믿고 있던 세계관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초인적 인간에게는 카인의 표적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싱클레어가 배운 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개안 (開眼) 하고 성장하는 것을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
그는 '표적' 하나를 가지고 있었어. 그걸 사람들은 자기 원하는 대로 설명할 수 있었어.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한테 편하고 자기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원하지. 사람들은 카인의 자손들이 무서웠어. 그들은 '표적' 하나를 가지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표적을, 그것의 원래 모습인 우월함에 대한 표창으로 설명하지 않고, 반대로 설명한 거야. 사람들은 말했지. 이 표적을 가진 녀석들은 무시무시하다고. 또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도 했어. 용기와 나름의 개성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늘 몹시 무시무시하거든.
싱클레어는 훈육으로 인해 형성된 기존의 세계관이 도전받을 때 큰 혼란을 느낀다. 데미안을 통해 낯선 세계를 접할 때마다 그는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서서히 비판적 사고를 하는 힘을 키우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며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싱클레어의 유년을 지탱하던 세계는 퇴적되고 낡은 것이 돼버린다. 싱클레어는 부모의 곁을 떠나고 독립한다.
시간이 흘러 싱클레어는 앳된 티를 벗은 청년이 된다. 싱클레어는 더 이상 부모의 보호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아이가 아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성욕을 느끼며 향락에 취한 채 방황한다. 자신이 어릴 때 그토록 두려워하던 어둠의 세계를 마음껏 향유하지만 싱클레어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낀다. 그러던 와중, 그는 데미안을 그리워하며 새 그림을 그려 보낸다. 데미안으로부터 받은 답장에는 다음의 짥막한 글귀가 쓰여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데미안에게 아프락사스의 의미를 알려준 것은 오르간 연주자이자 목사인 피스토리우스다. 피스토리우스는 데미안에 이어 싱클레어의 스승이 되는데, 그에 따르면 아프락사스는 신이자 악마인 양면적 존재이다. 유아적 인간은 보통 하나의 신을 가지는데, 이는 절반의 세계일 뿐이다. 이 쪽과 저 쪽의 경계를 정해놓고, 하나의 세계에서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유년기로 족하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통해 낯선 어둠의 세계의 두려움을 극복했듯이, 모름지기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낯과 밤의 세계가 공존함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을 두루 관조하는 혜안을 기르고 본인만의 세계관을 확립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재회하고,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흠모하게 된다. 그녀는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여성상이다. 그녀는 아프락사스와 같은 존재인데, 성녀인 동시에 관능미 넘치는 이브 같은 매력을 뽐낸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에바 부인과 교류하고 그녀는 그에게 성숙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한편, 전쟁이 발발하고 싱클레어는 참전한다. 그는 전쟁 중 부상을 당하게 되고, 꿈에서 데미안을 만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이별을 고하고, 꿈에서 깬 싱클레어는 덩그러니 혼자 남는다. 성숙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싱클레어는 더 이상 데미안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데미안처럼 카인의 표적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해버린 것이다. 카인의 후예가 된 싱클레어는 미래에 다른 누군가의 성장을 도와줄 것이다.
맺음말
헤르만 헤세는 평생을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분투한 구도자였다. 수도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헤르만 헤세는 자살 기도 후, 작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도망친다. 알을 깨고 날아가 버린 것이다. <데미안> 뿐 아니라 <싯타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등 그가 남긴 저작은 모두 ‘자기 자신의 완성’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룬다. 헤르만 헤세의 육신은 사라져 별이 되었지만, 그가 남긴 불멸의 작품들은 후세에 말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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