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이들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표현으로,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던데, 사춘기를 비교적 얌전하게 보냈던 나에게 때늦은 시련과 변화가 한꺼번에 휘몰아쳤던 그 해 겨울과 이듬해 봄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회억해 보려 한다.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 누구나, 큰 기회는 세 번 이상 만나고, 부모 속은 삼만 번쯤 썩여야 어른이 된다고 한다. 세 번의 기회 중의 하나는 내 짝을 제대로 만난 것이라는 확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나머지 두 번이 뭣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부모 속을 썩인 건지 상호 간의 갈등을 겪은 건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비슷한 것 삼만 번 중 이만 번은 그때 일어나지 않았던가 싶다.
훗날,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대학 시절의 성적표를 떼어 봤더니, 꼴등에서 갑자기 최상급으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추락하는 기복의 연속이라 미친놈 널뛰기한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았다. 그 경과와 이유는 앞에서도 이미 설명한 듯하지만, 성적이 좋으면 군대에 잡혀가거나 교수 요원으로 남아야 한다는 속설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승선을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그것을 원했고, 해군 소위가 되거나 대학의 조교로 남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시험 점수는 학점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받아 턱걸이하는 걸 시험 기술자라고 부르곤 했다.
그래도 내가 성적이 양호했던 학기는 학보사 기자 등의 외부 활동으로 시험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때가 대부분이었다. 학점에 걸리지 않을 자신이 없고 불안해서 답안지를 길게 쓰다 보면, 본의 아니게 점수가 잘 나와 버렸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A급 과실자>였던 나는 아무리 시험을 잘 춰 봐야 어차피 장학금을 받을 자격을 박탈당한 상태여서 고득점에 대한 열망이 거의 없었던 게 성적이 나빴던 원인이기도 하다.
그 결과는 졸업식에서 나타났다. 해기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른 해보다 이른 조기 졸업식이었는데, 역사상 가장 말썽꾸러기들이 많던 기수라 학교에서 가능한 한 빨리 쫓아내어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도 하루라도 빨리 자유를 얻고 해방을 맞는 일이 싫을 까닭이 없었다.
졸업한다는 얘기를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내 손님이 가장 많았다. 연로하셔서 특별히 할 일이 없던 부모님께서 아들 딸 손주들과 일가친척들을 몰고 관광 나오셨다.
학교 바로 옆에 사시는 잰이모와 외당숙은 걸음도 부실한 호호백발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나타나셨고, 조기 결혼은 반대했지만 장래의 사위로 인정하고는 있던 처가에서도 많은 손님이 오셨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졸업생 전체에서 내 손님이 가장 많은 것 같았다.)
아직 취직도 하지 않은 내게 내미는 용돈 청구 시위처럼 느껴졌다. 당시는 배를 타고 태평양으로 나가면 미국 돈이 지천으로 걸려 있는 줄로만 알던 시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졸업식만 하면 상장과 격려금을 독식하던 나에게 대한 기대도 섞여 있었을 게 분명하지만, <A급 과실자>라는 낙인이 찍혀서 졸업장을 받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나의 입장을 그들에게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학교를 대표해 마라톤 선수로 경기에 나가 메달을 받아온 적도 많았고, 학보사 기자로 시간을 희생하며 힘든 일을 피하지 않았던 학생에게 공로상 한 장이라도 줘도 되련만, 규칙을 어겨 가며 특별대우를 해줄 수는 없었다고 이해는 되었다.
그날에 썼던 일기장을 다시 꺼내 보니 ‘대학 4년의 결과는 실패했지만, 다시는 이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후회와 비장한 각오의 문장들로 가득 차 있는 걸 보면 어린 마음에는 상당한 충격이었고 깊은 내상을 입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더욱 큰일이 남아 있어서, 작은 감상에 빠져 머뭇거리고 앉아 있을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반백년을 해로하고 있는 내 아내와 사랑에 빠져 있었는데, 졸업을 하자마자 결혼식을 올린 후 경제적 자립을 위해 바로 승선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무관 후보생은 미혼이라는 자격 요건이 붙어 있어서 재학 중 결혼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양가의 허락을 받아 내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처가에서는 아직 공부도 끝나지 않은 금지옥엽을 불한당 같은 놈에게 서둘러 바칠 이유가 없었고, 친가에서도 기대하고 있던 내 월급의 관리자가 바뀔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양쪽을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승낙을 받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시간적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니,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쪽으로 계획을 바꿨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상의했더니 모두들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며 어려움은 있겠지만 계획대로 진행해 보자고 뜻을 모았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손을 내밀 수 있는 곳에서는 모두 돈을 빌렸고, 예식장을 계약하고 청첩장을 인쇄해 (학보사 편집장이어서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양가에 송부해 버렸다.
‘우리는 이미 성인이므로 허락하지 않더라도 결혼할 예정이니 참석 여부는 당신들의 선택에 맡긴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천방지축 일을 저지르고만 다니는 돈키호테를 위해 구걸하러 다녔던 친구들의 우정과 노고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감사할 뿐이다.
결혼식장은 참석을 하든 않든 양가의 친척들이 찾기 쉬운 곳으로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외버스 터미널 옆으로 정했는데, 식장 비용이 생각했던 것보다 비싸서 그것을 지불하고 나니 몇 푼 되지 않던 돈이 동나 버리고 말았다.
나머지는 친구들의 빛나는 활약과 노력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부두에 정박해 있는 상선들을 찾아다니며, 협박과 구걸을 해서 선불 축의금 명분으로 자금을 약간 모았고, 그 선박의 요리사들에게서 파티를 위한 술과 안주 거리도 빼앗아 왔다.
방학 때라 귀가해 있던 후배들에게 제복을 입히고 동원해서 예식장을 가득 메우고, <소고대>와 <밴드> 등의 동아리를 동원해 나팔 불고 북 치는 음악을 준비했으며,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주례까지 서 주셨으니 내용이야 어떻든 겉모양만이라도 초라하지 않은 결혼식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그렇게 밀어붙인 나의 혼례는 억지로 형식만 갖춘 셈인데, 결국은 양가의 부모님께서도 항복하고 참석하셔서 큰 무리 없이 무사히 끝나기는 했다. 철없던 우리 부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합법적으로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행복하기만 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아무런 생활 대책이 없었다.
당면한 재정난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선배들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승선하라는 연락이 왔다. 국적선이라 월급 수준이 낮았지만 그런 걸 따져 볼만한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서 권유에 따르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