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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바늘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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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튼튼한 토마토 Oct 23. 2021

바늘 04

건조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무역회사에 경리로 입사한 화진은 이곳에서 벌써 오년을 일했다. 꼼꼼한 일처리로 직장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화진은 기뻐보이지 않았다.언제나 화진의 눈빛은 공허했고 지쳐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그런 개인 사정을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걸 화진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피해를 주지 않을 만큼 일을하고 책잡히지 않는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살면서 어리광을 마음껏 부려본 기억은 애초에 없었다. 그런데 이쯤이야 뭐 대수로운 일 일까 싶었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손으로 주무르며 화진은 업무를 이어 나갔다. 몸속에 바늘이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그 어떠한 상황도 바꿔놓지 못했다.


“화진 주임님, 저번에 제가 부탁한거 처리되었나요?”


옆자리 이대리가 특유의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화진에게 말을 걸었다. 이대리가 몸을 움직이자 달큰한 향수냄새가 공기중에 흔들거렸다. 이런 향을 뭐라고 하더라. 비누에 장미꽃을 섞으면 나는 향기던가. 화진은 이대리와 향수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한번도 입밖으로 생각을 꺼낸적은 없었다. 스스럼없이 칭찬을 할 수 있을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네. 방금 메일 보내드렸어요. 확인해보고 이상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고마워요. 확인해 볼게요. 근데 주임님 안색이 안좋은데 무슨일 있어요?”


이대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화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봐요.”

“하긴 요즘 일이 너무 많았다. 나도 요 며칠은 정말 정신이 없었어. 며칠만 있으면 주말이니까 우리 힘내요.”


월말이 되면 처리해야하는 업무가 늘어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피곤할 수 밖에 없었다. 피곤한것도 사실이니 화진이 아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팀에 사람을 충원해 줬더라면 이정도로 일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화진과 이대리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이대리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사탕 몇개를 꺼내 화진에게 건네주었다. 


“달달한거라도 먹고 기운차려요.”


사탕을 건네주는 이대리의 잘 정리된 손톱이 반짝였다. 이대리가 준 청포도맛 알사탕을 우물거리며 화진은 이대리가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실대로 모든것을 말 할 수는 없었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친절한 사람을 모두 믿어도 되는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인의 친절을 목도 할 때마다 나도모르게 비밀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사실 제 몸에 바늘이 있어요.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제 몸속에 바늘이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말한들 누가 그 사실을 믿을 것 이며 누군가 그 말을 믿는다 하더라도 구태여 그 말을 꺼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자신의 약점이 될 것 같은 정보를 타인이 알아서 좋을것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은 화진은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화진은 바늘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다 바늘이 내 몸에 들어오게 된 것 일까. 누군가가 화진이 잠든 틈을 타서 감쪽같이 배를 가르고 바늘을 집어 넣었을리는 없었다. 만약 그런 불가능한 일이 화진 몰래 일어났다면 몸에는 흉터가 남아있어야 했다. 병원에서 바늘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화진은 몸 구석구석을 살펴 보았다. 혈관이 비치는 얇은 피부에는 인위적인 어떠한 상처 자국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온 몸 구석구석을 살펴본 후에야 안심 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건강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화진은 바늘을 품에 안고 살아가게 될 것 이다. 


어떻게 바늘이 몸속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화진은 바늘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지금이야 이상이 없다고는 하지만 바늘이 움직여서 심장을 찌르거나 폐로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이 바늘이 내 인생에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아닐까. 화진은 바늘이 붉은 혈관을 타고 자신의 장기를 난폭하게 찌르는 장면을 상상했다. 깊고 차가운 강을 유려하게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따뜻하고 뜨거운 피의 강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바늘. 바늘로 인해 화진은 아주 오래전부터 원하던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름지기 시한폭탄이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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