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바늘 05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튼튼한 토마토 Oct 23. 2021

바늘 05

눈을 떠보니 벌써 아침 열시가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어제 퇴근을 하고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서 샤워를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잠이 덜깬 화진은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기다리던 주말이 돌아왔다. 별다른 할일 없는 주말이지만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로 주말은 특별했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의 투룸에서 화진은 꽤 긴 시간을 보냈다. 습기로 장판이 들뜨고 좁은 화장실에 곰팡이가 자꾸만 생겨 괴롭지만 화진은 어째서인지 이사 갈 생각이 없었다. 발품을 팔면 지금 여기보다 더 좋은 집을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이곳은 화진의 모친이 어렵사리 구한 집 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화진은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집은 좁고 낡았으며 문을 열때마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이 선택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임을 알고 있었다. 한겨울에는 웃풍이 불어 코끝이 빨개지고 아랫집의 텔레비전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오는 집 이었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방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꿨떤가. 무언가가 되고싶다는 열망을 이 방에서 싹틔우곤 했었나. 고작 십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 아주 멀게만 느껴져 모든 기억이 희미했다.


집에 대해 애틋한 추억이 있는것은 아니었지만 이 모든것을 혼자서 정리하고 이사를 가려니 막막했다. 짐이 많은편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지낸 긴 시간들을 차곡차곡 정돈해야 하는 일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화진은 침대 프레임없이 놓여진 매트리스 위에 한참을 누워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냉장고에는 마실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냉각장치가 고장났는지 냉장고에서 막 꺼낸 물이 미지근했다. 상할만한 음식이 들어 있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반찬 뚜껑을 열었을 때 보이는 푸르고 흰색 솜털같은 곰팡이를 더 이상 치우고 싶지 않았다. 


화진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살림 형편이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삶은 어렵기만 했다. 화진이 꿈꾸던 보통의 삶은 컵라면을 사면서 통장에 얼마가 남는지 치열하게 계산하지 않는 삶 이었다. 그런 삶을 산다면 적어도 몇백원 차이 때문에 먹고싶은 삼각김밥을 사지 못하는 일은 없을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라던 보통의 삶의 궤도에 올라왔을때 화진은 조금 기뻤던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게 화진이 원하던 삶이었을까.


“4200원 입니다. 카드 앞쪽에 꽂아주세요.”


피곤해보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에 따라 화진은 계산을 했다. 퀭한 아르바이트생의 눈가를 보니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밥벌이는 고된 법 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영혼이 없는 눈동자로 지하철에 오르는 나도 누군가에게 안쓰러워 보일것이 분명했다. 사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이 도시의 모두는 서로에게 신경쓸 여력이 없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만. 


편의점을 나오자 바람에 벚꽃이 흩날려 거리를 분홍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봄이 찾아왔다. 화진의 기분에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새로운 계절이 찾아온다. 확연히 따뜻해진 바람이 머리카락을 기분좋게 헝크러트렸다. 화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계절은 부지런하게 바뀌고 사람들은 착실하게 일을 해나갈 것 이다. 화진은 스스로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슬퍼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일순 꽃잎이 낭자한 봄길이 일렁이는것 같았다. 

이전 04화 바늘 0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