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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hail Jan 24. 2020

내가 사업을 하는 이유

#파뮬러스_이야기

왜 파뮬러스라는 회사를 만들었죠?
아니, 그보다는... 왜 굳이 파뮬러스입니까?


살아가다보면, 평소와 다름없는 순간이 다른 울림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2019년 11월 어느날, 우연히 만난 질문이 그랬다.

나는 입에서 바로 튀어나오는 '아, 저는 어렸을때 부터...'같은 정해진 대답보다는
내가 정말 이 '파뮬러스'라는 것을 왜 하고 있지? 같은 생각이 마음 속에서 들기 시작했고,
왠지 대충 대답해버리고 싶지 않아졌다. 결국 내 대답은 2020년 1월 중순이 되어서야 전해졌다.


2015년 말,

나는 우연한 기회에 개인 봉사자로서

지방에 있는 한 유기동물보호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TV동물농장에서만 보던 보호소는 온데간데 없고

동물과 보호소 관리자 모두 보호받지 못하는 공간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보호소 관리자는, 온갖 병에 시달리는 표정으로 개밥을 물에 불려먹고 있었고

몇 백마리가 넘는 보호소의 동물들은 미흡한 관리와 쓰레기 더미 속에서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보호소의 마당에는 몇몇 단체와 회사로부터 기부받은 박스들이 있었는데

한 봉투당 2개가 들어있는 강아지 간식 몇 가지, 유통기한이 내일이면 지나는 사료 몇 포대, 배변패드와 강아지 기저귀 몇장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이곳만 이런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곳도 이런가? 내가 잘 못 알고 있었던 건가?

이런 의문도 잠시,

곧이어 동물들을 버리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왜 생명을 버려대는지, 찾아가서 뺨이라도 대차게 한 번 올리고 싶었다.

보호소 관리자에게 따지고도 싶었다.

이게 무슨 꼴이냐고. 이럴 거면 시작을 하지말지, 왜 시작을 해서 당신 하나도 간수를 못하냐고.

당신 입에 풀칠이라도 하면서 이런걸 하라고. 당신 때문에 저렇게 많은 생명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당장 그만두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과 유기견의 공간도 분리되지 않은 채, 유기견들의 대소변에 섞여 살아가고

밥 한톨도 기부금으로 사먹지 못하는 보호소 관리자들에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또한, 더러운 공간에서 하루 라면 한 끼 간신히 먹는 관리자들의

식사조차, 눈치없이 방해하는 유기견들도 미웠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 목이 쉬어라 관리자가 소리를 질러대도, 알아듣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유기견들의 표정까지도 정말 미웠다.


그러다 내 시선은

보호소 마당에 놓인 그 의미 없는 기부 물품들에서 멈추었다.

정말, 이 몇백마리의 동물들에게 그 간식 몇개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준걸까?

이 사료들은 어떻게 먹으라고 이렇게 준 것이며,

박스에는 왜 그렇게 기업로고가 크게 박힌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게 된 한가지는,

이 보호소에 오는 물품들과 기업 봉사자들마저도,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버려졌는데, 지금이 보호소와 유기동물들에게도 깊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그 현실이 끔찍하게 다가 왔다.

맞다.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겉치레들 밖에 없는 이 기괴한 문화속에서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졌다.


이런 끔찍한 동물 유기 문제가 생긴 이유는

보호소 안의 개들은, 아마도 받아들여질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족의 범주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었다.

'반려'동물이건, '애완'이건

함께 살고, 서로가 교감하는 사이라면, 서로의 삶을 함께 살아가나가는 가족이다.

가족은 어느 한 쪽이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적어도 버려진 강아지들에게는 전 반려인들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 반려인은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의 욕구 충족을 위해 그저 소비했었기 때문에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끝끝내 가족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과 '애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운명인지 아닌지가 아닐까?

애초에, 강아지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방식 자체가 펫샵과 같은 쇼윈도에서 '선택'을 통한 것이고

그 '선택'은 '욕구충족'을 위한 것이니까. 절대로 가족과 같은 '운명 공동체'가 될 수 없다.

우리가 가족을 선택하는 방식이 욕구충족을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을 해본다면,

그러니까 쉽게 어머니와 아버지를, 혹은 아들과 딸을 쇼윈도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게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아마 그렇게 된다면 책임감 없는 관계로 서로를 부르다가 용도가 사라지면 버리게 되지 않을까? 백화점에서 쇼핑하듯이.

국내 보육원에서는 인간의 아이를 입양할 때에, 입양아를 미리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키울 여력이 되는지 보육원이 부모를 '선택'한다.

부모는 책임감과 조건을 맞추고 보육원 아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 크지 않은 그 아이의 아이큐가 어떠한지, 잘 생겼는지는 물어볼 수도, 알아볼 수도 없다. 만약 고르는 태도라면, 그 부모는 보육원 자체적으로 블랙처리가 되어 다시는 아이를 입양할 수가 없다.

왜냐면 '가족'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욕구'보다는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야지만 정말 가족이 될 수 있다.

개도 마찬가다. 책임감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버려지게 되어있다.

그런데, 국내의 반려동물 환경은 어떠한가?

펫샵도 펫샵이지만, 유기동물 정보도 마치 쇼윈도와 같이 보여준다. 참고로 국내 유기동물 파양률은 약 60%에 달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단순히 어떤 하나의 제도가 생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에 '홀트 아동복지원'과 같은

'유기견 보육원'을 만들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작게는 우리나라부터, 넓게는 세계까지.

기존 안락사 없이 운영되는 사설 유기동물 보호소들을 기반으로 이런 '보육원(복지원)'을 운영한다면

이곳에서 입양을 하는 사람들은, 가족을 입양한다는 마음으로 '강아지'를 입양하게 될 것이고

이런 보육원들이 결국 반려동물 문화의 시작과 끝에서 강아지와 반려인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런 믿음으로 나는 famulus라는 사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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