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로 읽는 디자이너의 진화 1.0
프로세싱(Processing)은 시각예술과 디지털 창작의 세계에 혁명을 가져온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2001년 MIT 미디어 연구소(MIT Media Lab)에서 케이시 리아스(Casey Reas)와 벤자민 프라이(Ben Fry)가 개발하여 처음 공개한 이 도구는, 프로그래밍 경험이 없는 예술가와 디자이너들도 쉽게 코드를 통해 창의적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로세싱은 지속적으로 진화하며 현재 버전 4.4.10에 이르렀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창작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프로세싱은 MIT 미디어 연구소의 미학과 계산 그룹(Aesthetics + Computation group)에서 존 마에다(John Maeda)의 '디자인 바이 넘버스(Design By Numbers)'의 후속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당시 개발자들은 로고(Logo)나 베이식(BASIC) 같은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가 제공했던 단순하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에서 영감을 받았다. 프로세싱의 핵심 철학은 복잡한 자바(Java) 문법을 단순화하면서도 그래픽, 오디오, 애니메이션 등을 쉽게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Proce55ing'이라는 독특한 표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processing.org 도메인이 이미 선점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도메인을 확보하면서 현재의 'Processing'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개발자들이 프로세싱 구축에 자바를 선택한 것은 웹 브라우저 호환성과 독립 실행 가능성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기술을 찾던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 선택은 나중에 프로세싱의 성공과 커뮤니티 확산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처음 공개 이후 알파와 베타 단계를 거치며 미디어 아트 분야의 여러 교육기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프로세싱의 첫 정식 버전인 1.0은 2008년 11월에 공개되었다. 공개부터 정식 버전 출시까지 7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것은 개발자들이 안정성과 호환성을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세싱의 개발은 모두 오픈 소스로 진행되었으며, 2011년 4월에 공개된 1.5 버전부터는 안드로이드(Android) 모드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는 프로세싱으로 개발한 스케치를 안드로이드 장치에서도 실행할 수 있다는 의미로, 창작의 범위를 대폭 확장시켰다.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2.0 버전은 2013년 6월에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2.0으로의 업그레이드는 단순한 기능 추가를 넘어 시각적 혁신을 가져왔다. 아이콘, 로고, IDE 디자인 등이 완전히 새롭게 단장되었으며 웹사이트도 대규모로 개편되었다. 기술적으로는 오픈지엘(OpenGL) 라이브러리가 강화되었고, 기존의 퀵타임(QuickTime)에 의존하던 비디오 라이브러리가 지스트리머(GStreamer) 기반의 완전히 새로운 라이브러리로 교체되었다. 또한 엑스엠엘(XML) 지원이 강화되었고, 테이블 클래스가 추가되어 CSV 등의 데이터 포맷을 직접 다룰 수 있게 되었다.
2.0 버전에서는 64비트 지원이 대폭 강화되었으며, 맥OS 버전의 경우 환경설정에서 32비트와 64비트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세싱 2의 최종 버전인 2.2.1은 2014년 5월에 발표되었고, 그 이후 개발은 프로세싱 3으로 넘어갔다.
2015년 9월 30일에 정식 출시된 3.0 버전은 사용자 경험의 혁신을 이루었다. 2를 거칠 때의 대규모 내부 개편처럼 3도 상당한 변화를 거쳤지만, 다양한 기능이 추가되면서 더욱 전문적인 도구로 성장했다. 가장 눈에 띄는 개선사항은 에디터와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완전한 개선이었다. 자동완성(Auto-completion) 기능이 드디어 지원되기 시작했고, 디버거(Debugger)도 추가되었다. 이는 비주얼 스튜디오(Visual Studio)나 이클립스(Eclipse) 같은 전문적인 통합개발환경에서 당연하게 제공되던 기능들이, 드디어 프로세싱에도 도입되었다는 의미였다.
3.3 버전 기준으로는 한글화가 상당히 많이 진행되었다. 메뉴의 대부분이 한글로 제공되었고, 코드 입력 시 한글이 깨지거나 겹치는 현상도 해결되었다. 고해상도 디스플레이 대응도 이루어져 4K나 레티나(Retina) 같은 고밀도 디스플레이에 대응하는 함수들이 추가되었다. 특히 통합 추가요소 관리자(Unified Contributions Manager) 기능이 도입되어 라이브러리, 모드, 도구 등 여러 요소를 한 곳에서 쉽게 추가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2024년 출시된 프로세싱 4.0 버전은 지난 20년간의 기술적 부채를 정리하고 미래에 대비하기 위한 대규모 개편이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자바 8에서 자바 17로의 업그레이드였다. 이는 보안, 성능, 그리고 장기적인 플랫폼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결정이었다. 또한 애플 실리콘(Apple Silicon) 지원이 추가되어 맥북 에어와 프로(MacBook Air/Pro)의 M1, M2, M3 칩에서도 빠르게 동작하게 되었다.
프로세싱 4.0은 사용자 경험을 한 단계 향상시키는 여러 기능도 제공했다. 이제 사용자들은 도구 메뉴의 '테마 선택(Theme Selector)'에서 자신의 선호도에 맞는 색상 테마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스케치의 기본 이름 지정 방식을 변경할 수 있으며, 선호도에 따라 자신만의 이름 생성 목록을 만들 수도 있다. 새로운 윈도우 크기 조정 비율(windowRatio()) 함수는 창의 크기가 바뀔 때마다 스케치를 자동으로 조정할 수 있게 도와준다. 무비 메이커(Movie Maker) 도구는 에프에프엠펙(ffmpeg) 기반으로 애니메이션 GIF뿐만 아니라 고해상도 손실 없는 MPEG 동영상도 생성할 수 있다.
프로세싱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p5.js를 빼놓을 수 없다. 제이슨 레식(Jason Resig)에 의해 시작되고 2008년 첫 릴리스 이후 세네카 컬리지(Seneca College) 학생들에 의해 계속 개발된 이 라이브러리는 프로세싱 코드를 자바스크립트(JavaScript)로 포팅(Porting)한 것이다. p5.js를 통해 웹 브라우저에서 자바 애플릿(Java Applet)이나 플래시(Flash) 플러그인 없이도 프로세싱의 창작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프로세싱의 영향력을 웹 기반으로 확대한 매우 중요한 발전이었다.
프로세싱이 가져온 영향은 다른 도구들의 탄생으로도 이어졌다. 2003년 이탈리아의 인테라랙션 디자인 인스티튜트(Interaction Design Institute Ivrea)에서 만난 케이시 리아스와 에르난도 바라간(Hernando Barragán)은 마이크로컨트롤러용 프로세싱 같은 환경인 와이어링 아이디이(Wiring IDE)를 개발했다. 와이어링의 성공은 이후 마시모 반지(Massimo Banzi)가 더 저렴한 마이크로컨트롤러를 지원하도록 포크(Fork)하여 아두이노(Arduino)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자크 리버만(Zach Lieberman)의 오픈프레임웍스(OpenFrameworks)와 앤드류 벨(Andrew Bell)의 신더(Cinder)도 프로세싱의 철학을 계승하면서 더욱 강력한 성능을 추구하는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2012년 설립된 프로세싱 재단(Processing Foundation)은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배포를 지원하고, 전 세계의 창의적 코더들 커뮤니티를 육성해왔다. 재단은 2011년부터 구글 서머 오브 코드(Google Summer of Code)에 참여하며 수십 개의 중요한 기능 개발에 기여했다. 2001년 이후 프로세싱에 대한 20권 이상의 책이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 수천 명의 사람들이 프로세싱 커뮤니티의 발전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현재 프로세싱의 버전은 4.4.10에 이르렀으며, 케이시 리아스와 벤자민 프라이는 여전히 개발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프로세싱의 새로운 프로젝트 리더 다니엘 쉬프먼(Daniel Shiffman)과 함께 이들은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서의 프로세싱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초기 알파와 베타 단계에서 미디어 아트와 비주얼 디자인 분야에서만 주로 사용되던 프로세싱은, 2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며 대규모 설치 미술, 모션 그래픽, 복잡한 데이터 시각화 작업까지 다루는 전문 도구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프로세싱이 잃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누구나 코드를 통해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초심이다. 프로세싱은 여전히 무료이며 오픈 소스이고, 맥OS, 윈도우(Windows), 리눅스(Linux), 심지어 라즈베리 파이(Raspberry Pi)에서도 동작한다.
프로세싱의 여정은 단순히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술적 진화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비프로그래머도 디지털 창작에 참여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플랫폼을 계속 발전시켜온 개발자들의 열정과 전 세계 창의적 코더들의 다양한 참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2025년 현재, 프로세싱은 여전히 미디어 아티스트, 학생, 디자이너, 그리고 프로그래머들의 디지털 스케치북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앞으로도 프로세싱이 가져올 새로운 가능성과 창작의 경험들을 기대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