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로 읽는 디자이너의 진화 1.0
터치디자이너(TouchDesigner)의 역사는 단순한 소프트웨어의 발전기가 아니라, 실시간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추구하는 창작자들의 꿈이 기술로 구현되어온 이야기다. 1980년대 그래픽스 전설에서 출발한 이 도구는 노드(node) 기반의 비주얼 프로그래밍을 통해 프로그래머뿐 아니라 아티스트, 디자이너,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며, 오늘날 전 세계 미디어 아트 현장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터치디자이너의 역사는 실은 더 오래되었다. 1984년부터 1987년 사이에 토론토, 로스앤젤레스, 뉴욕의 옴니버스 컴퓨터 그래픽스(Omnibus Computer Graphics)에서 만들어진 프리즘(PRISMS) 소프트웨어에서 비롯되었다. 이 당시의 프리즘은 이미 노드 기반의 3D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오늘날 터치디자이너의 원형을 닮아 있었다. 옴니버스가 재정적 어려움으로 무너졌을 때, 프리즘은 그렉 허머노비치(Greg Hermanovic)와 킴 데이비슨에 의해 구매되었고, 이것이 훗날 하우디니(Houdini)를 만드는 사이드 이펙츠(Side Effects) 소프트웨어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허머노비치가 2000년에 데리베이티브(Derivative)를 설립하면서, 터치디자이너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초창기 터치디자이너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007 버전에서 017 버전으로 진화해나갔다. 이 시기의 터치디자이너들은 실시간 2D와 3D 인터랙티브 애니메이션을 목표로 개발되었으며, 아트, 미디어, 비주얼라이제이션(visualization) 등 다양한 창작 영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한 전환점은 2008년에 찾아왔다.
2008년 데리베이티브가 공개한 077 베타 버전은 터치디자이너 역사에서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이전까지의 모든 코드를 다시 작성한 완전한 재구성이었기 때문이다. 077 버전의 가장 큰 혁신은 그래픽스 처리 단위(GPU) 기반의 완전한 절차형 오픈지엘(OpenGL) 컴포지팅(compositing)과 렌더링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인터페이스를 개선한 것이 아니라, 실시간 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기술적 도약이었다. 복잡한 3D 기하학적 형태를 다루거나 수백만 개의 입자를 제어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도 이 시점부터였다.
이후 099 버전으로 진화하면서 터치디자이너는 현재의 모습으로 안정화되었다. 099는 077의 다음 세대로, 그 안정적인 플랫폼 위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기능들이 추가되어왔다. 2018년 099가 맥(Mac) 운영체제를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윈도우(Windows) 중심이던 생태계가 보다 포용적으로 확대되었다.
2023년 공식 업데이트는 터치디자이너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 버전에서는 파이썬(Python) 버전을 3.11로 업그레이드하면서 실행 속도를 기존 대비 10배에서 60배까지 높일 수 있게 했다. 또한 언리얼(Unreal) 플러그인을 통해 언리얼 엔진과의 직접적인 연계가 가능해졌으며, 이는 게임 엔진 사용자들도 터치디자이너의 실시간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패널 컴포넌트(Component)의 성능 개선도 이루어져, 복잡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2024년과 2025년은 더욱 혁신적이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포인트 오퍼레이터(Point Operators, POPs)의 공식 도입이다. 이전의 서피스 오퍼레이터(Surface Operators, SOPs)는 1995년에 설계되어 중앙 처리 장치(CPU) 기반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실시간 처리에 한계가 있었다. 반면 POP들은 처음부터 그래픽스 처리 장치의 구조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어, 수백만 개의 포인트를 가진 파티클 시스템이나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를 매끄럽게 처리할 수 있다. 이는 건축 시각화, 대규모 데이터 처리, 첨단 파티클 애니메이션 등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2025년 공식 버전에서는 색 공간 워크플로우(Color Space Workflow)도 추가되었다. 에스알지비(sRGB), 에이씨이에스씨지(ACEScg), 디씨아이-피쓰리(DCI-P3) 등 다양한 색공간을 지원함으로써, 방송과 영화 산업의 고도한 색감 관리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파이썬 개발 환경도 대폭 개선되어,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코드(VS Code) 연계로 자동완성과 도움말 팝업이 가능해졌다.
터치디자이너의 발전은 단순한 버전 업데이트만은 아니었다. 오퍼레이터(operator)라 불리는 노드 기반의 작은 단위 도구들이 지속적으로 추가되고 개선되었다. 탑(TOP)은 2D 이미지 처리, 초옵(CHOP)은 모션과 오디오 제어, 솝(SOP)은 3D 기하학, 맷(MAT)은 재질(material) 처리, 댓(DAT)은 데이터 관리, 컴프(COMP)는 컴포넌트 조립을 담당한다. 이런 모듈식 구조 덕분에 사용자들은 마치 레고 블록을 쌓듯이 자신의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레이저(Laser) 처리 기능의 강화, 디엠엑스(DMX) 조명 제어의 확대, 스테레올랩스 제트 이디(ZED) 카메라 지원 등은 터치디자이너가 단순한 화면 제작 도구를 넘어 무대 장치, 설치 미술, 건축 비주얼라이제이션 같은 현장의 실제 필요를 맞춰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 브로드캐스팅 코퍼레이션(BBC) 같은 거대 방송국부터 소규모 인디 아티스트까지, 모두가 터치디자이너를 통해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하고 있다.
터치디자이너의 30년이 넘는 역사는 기술의 발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드 기반 프로그래밍이라는 철학이 코더가 아닌 창작자들에게 첨단 기술을 민주화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맥스(Max) 음악 프로그래밍 환경, 퓨어 데이터(Pure Data), 뷔뷔뷔뷔(vvvv), 쿼츠 컴포저(Quartz Composer) 같은 다른 노드 기반 도구들이 등장했지만, 터치디자이너는 실시간 3D 그래픽스라는 독특한 영역에서 꾸준히 그 위치를 지켜왔다. 30년 이상의 개발 역사가 만든 안정성과, 최신 기술을 빠르게 수용하려는 데리베이티브의 의지가 만나면서, 터치디자이너는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닌 창의적 표현의 언어가 되었다.
프리즘의 정적인 그래픽에서 시작하여, 077 베타의 GPU 혁신을 거쳐, POP의 도입에 이르기까지. 터치디자이너는 기술의 변화를 따라잡으면서도 사용자의 창의력을 방해하지 않는 균형을 유지해왔다. 2025년의 현재, 터치디자이너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으며, 다음 장을 어떻게 써나갈지는 전 세계 창작자들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