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ldred Jul 29. 2020

빨간 코트를 입었다

"아니, 미리 드레스코드 좀 알려주지 그랬어. 다들 블루 계열인데 나만 핑크색으로 입었네."



크리에이티브 본부 사람들의 옷차림은 두 갈래로 나뉜다. 무난하거나 튀거나. 전자는 보통 그레이, 블랙, 네이비 컬러를 즐긴다. 야근을 많이 하는 직업 특성상, 굳이 잘 차려입고 출근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게 그들이었다. 후자는 가지각색인데 파스텔이나 원색처럼 밝고 눈에 띄는 컬러를 주로 활용한다. 액세서리나 신발에서 포인트도 놓치지 않는다. 가끔 과한 이들도 있다.


나는 후자다. 어느 날 사무실을 둘러보니 우리 팀에서 나만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드레스코드를 공유받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제작발표회 때 미처 드레스코드를 전달받지 못했던 조정석처럼 말이다.


농담이었다. 그때는, 분명히.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드라마에서 '호랑'이 엄마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위 '빨간 코트'라 불리는 아줌마는 관리도 잘하고 주름도 없고 돈도 잘 버는 데다 주변 사람들에게 밥도 잘 산다. 하지만 정작 놀러 갈 때 그녀는 빼놓고 간다. '호랑'은 그녀처럼 되고 싶지 않다며 남들이랑 섞여 있어도 튀지 않고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요즘, 내가 빨간 코트를 입은 것 같다. 이 여름에, 이 더위에, 이 습기에.



7월 1일 부로 덜컥 부장이 됐다. 승진하는 줄도 몰랐다. 당일 날 아침, 대표로부터 온 전체 공지 메일을 통해 알았다. 여느 날처럼 커피를 챙겨 자리로 돌아가던 중에 말이다.


이직한 지 8개월, 이제 좀 이 회사에, 이 시스템과 이 사람들에 적응할 만했는데 그래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난데없이 승진이라니.


어느 회사나 부장이라는 건 관리직이었고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일도 많아진다는 거였다. 예상을 못한 건 아니었지만 준비되지 않았던 건 확실했다. 그래서 괴로웠다.


게다가 같은 차장이었다가 혼자 부장이 되고 나니, 이렇게 저렇게 돌고 돌 이야기들도 두려웠던 것 같다. 8년 전에 대리가 될 때도 아직 내 앞가림도 못 하는데 대리가 돼도 되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어쩌자고 10년이 다 되도록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계속 빨간 코트를 입고 있어야 하는 걸까. 까만 코트를 입었던 엄마 친구들이 모르는 빨간 코트 그녀만의 사정은 없었을까. '사이코지만 괜찮아' 속 '문영'의 화려한 옷차림처럼,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은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