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종이에 스며든 감성

종이에 깃든 나만의 결

by Color Curator

피렌체, 종이에 스며든 감성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다시, 나는 피렌체의 골목길에 서 있었다.

빨간 지붕과 두오모 성당, 베키오 다리가 어우러진 풍경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온 듯했다.

피렌체 전경이 보이는 엽서 ⓒ Hyun Oh

하지만 내가 이 곳을 찾은 이유는,

단순히 유명 관광지여서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유럽 도시 중에서도 유독 이 도시에 마음이 끌렸던 것은, 나와 맞는 어떤 ‘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피렌체를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이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쇼핑의 도시라 부른다.

하지만 나에게 피렌체는 종이의 도시, 그리고 만년필이 가장 아름답게 움직이는 도시다.


만년필로 멋지게 글을 쓰시던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아니면 어린 시절 펜글씨와 서예를 배웠던 경험 때문이었을까.

종이와 필기구에 대한 애정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도 흔한 볼펜보다는 손이 많이 가는 만년필로 글을 써 내려갈 때, 비로소 ‘나다운 감각'이 되살아난다.

그 고유한 번짐과 질감 속에서, 나의 글자들은 종이 위에 이야기처럼 천천히 스며든다.



예술이 손끝에 스며드는 도시


피렌체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한 걸음마다 시선이 붙잡힌다.
명품의 본고장답게 장인정신이 깃든 가죽 제품, 섬세한 수제 공예품,

그리고 독창적인 패션 브랜드들이 다정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 Hyun Oh

문득 고개를 들면, 눈부신 파란 하늘이 맞아준다.
그 하늘이 발걸음까지 가볍게 만들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골목 구석구석을 헤매인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한 곳을 만났다.
겉으로 보기엔 소박했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치 작은 명품관에 들어온 듯했다.


피렌체에서 데려온 소중한 노트와 필기구

마블지로 입힌 수제 노트와 카드, 다이어리, 편지지, 그리고 만년필 케이스까지—

그곳은 내게 작은 명품관과도 같았다.

그 안에서 나는 30분이 넘도록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매장의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처음 매장을 볼 때는 신기한 물건들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다시 돌아보면서는 넉넉하지 못한 예산을 어떻게 잘 사용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마블지 편지지, 가죽노트, 잉크와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남겨둔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다음에는 꼭 데려가야지’라는 다짐을 품은 채로.



마블지 만들기 워크샵 ⓒRiccardo Luci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남은 이 도시의 전통 마블지는 종이 위에 펼쳐지는 르네상스 그 자체다.

중세 시대부터 내려온 'papier à cuve' 전통 기법 그대로 이어왔다.

물 위에 색을 풀고, 섬세한 도구로 패턴을 그려 넣은 뒤, 종이를 덮어 찍어내는 이 과정은 기술이기 이전에 감성이며, 반복이기 이전에 창조다.

마블링 종이 표면에 펼쳐지는 ‘공작깃털 무늬’는

12가지 색상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같은 무늬는 두 번 다시는 나오지 않기에, 마블지는 언제나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마치 사람처럼 각자 ‘나만의 패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블지는 단순한 무늬를 넘어, 수십 년의 시간을 견뎌온 장인의 숨결이 깃든 물건이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에게는 진정한 명품이었다.


워크샵에서 만들어본 나만의 패턴


전통 공방 일파피로(Il Papiro)에서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두 번째 피렌체 여행에서, 학생이던 나에게 주인이 무료로 마블링 워크숍을 열어주었다. 물 위에 기름으로 나만의 무늬를 그려내던 순간, 나는 잠시 피렌체의 중세시대 예술가가 된 듯했다. 역시 중세 예술가가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때 비로소 온몸으로 체감했다. 이 섬세한 작업에는 어울리는 컬러를 선택하는 감각부터, 물감을 떨어뜨리는 간격, 패턴을 눌러 찍는 적절한 힘까지 모두 필요했다. 한 번 시작하면 수정할 수 없기에, 그 모든 순간이 바로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다.


패션과 뷰티를 사랑하는 나에게 종이와 필기구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다. 몸에 입히고 얼굴에 바르는 아름다움이 외향적 미학이라면, 종이 위에 새겨지는 글씨와 문장은 내면의 결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피렌체의 종이는 내 안의 감각을 따라가며, 감정의 흐름을 함께 기록하는 은밀한 공간이다. 피렌체는 외면과 내면의 조화를 품은 도시다.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조화를 찾아보길 바란다.



피렌체의 컬러


바실리카 디 산 미니아토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빨간 테라코타 지붕과 오프화이트, 혹은 밝은 크림색 외벽이다. 도시의 클래식한 아름다움이 녹색 자연과 어우러져 균형 잡힌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피렌체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건축과 자연이 하나의 화폭 안에 담긴 듯하다.


도시의 중심으로 눈을 돌리면,두오모가 위엄 있게 서 있다. 붉은 돔은 하늘과 맞닿아 도시 전체를 감싸 안는 듯하고, 흰색과 초록색 대리석이 교차하는 외벽은 고요하면서도 장엄함을 남긴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섬세한 조각과 무늬들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건축이 아닌 거대한 예술 작품을 마주한 듯하다.


그리고 해 질 무렵, 아르노 강변에 서면 피렌체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붉게 물든 하늘과 도시의 불빛이 강물 위에 비치고, 다리와 건물들이 물결에 흔들리며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피렌체의 추억은

잉크처럼 번져 내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다음 만남은 언제일까.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마음속에서 새로운 편지를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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