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과 피렌체 사이
피렌체의 겨울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엽서에 담긴 날씨처럼 햇살은 온기를 머금고 골목 위에 내려앉았다.
바람은 코트를 스치며 부드럽게 어깨를 감쌌고,
돌길 위로 울리는 부츠 굽소리,
작은 비누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라벤더 향,
크리스마스 장식 가게 창에 반짝이는 오너먼트,
골목 끝에서 풍겨오는 피렌체식 스테이크의 고소한 불향까지.
모든 감각이 나를 붙잡았다.
이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톤앤톤 질감 대비 속,
붉은 지붕, 은빛 아르노 강, 따스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오너먼트까지,
색과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풍경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붉은 테라코타 지붕은 따스한 햇살 아래 깊고 풍부한 오렌지빛으로 반짝였고,
대리석 외벽은 눈부신 흰빛과 부드러운 회색이 서로 어우러져
시간과 햇살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장식과 아치, 조각상의 그림자까지,
손끝으로 만질 수 있을 듯한 질감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오모 성당 전망대로 향하는 463개의 계단은 숨을 거칠게 몰아붙였지만,
꼭대기에서 마주한 풍경이 모든 피로를 잊게 했다.
붉게 물든 지붕과 은빛 아르노 강, 베키오 다리, 햇살 속을 흐르는 종소리—
마치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본 장면처럼,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런던행 저가항공편 상태를 확인하던 내 눈에 선명하게 찍힌 단어—CANCELLED.
순간, 피렌체의 햇살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온통 하얗게 갇힌 런던 활주로의 이미지만 가득 찼다.
또 얼마나 오래 걸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일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오늘 안에 반드시 영국 땅을 밟아야 했다.
머리는 차갑게 식었지만,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가지고 있던 저가항공 티켓 환불은 지금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어떻게 해서든 런던으로 돌아가는 것.
반드시 방법이 있을 거라 믿으며, 나는 그 생각에 온 힘을 모았다.
‘폭설이 그치면, 자국 항공사들이 먼저 출발할 거야..
그렇다면 영국항공!! 여기서 히드로공항으로 가는 편을 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공항은?’
지금,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었다.
비싼 항공편 구매는 친구에게 온라인으로 부탁하고,
나는 가장 가까운 공항으로 전력 질주했다.
머릿속 지도 위에서 발끝이 멈춘 곳 — 피사.
계획에도 없던 도시가, 그 순간 내 구세주로 떠올랐다.
기차 창밖으로 겨울 들판과 작은 마을이 스쳐갔다.
조마조마함과 기대가 뒤섞였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켠은 차분했다.
여행이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일 줄은 몰랐지만,
그 긴장감 덕에 하루가 더 선명하게 살아났다.
피사공항으로 가는 길, 광장 한쪽에서는 관광객들이
‘사탑을 받치는 손’ 포즈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햇살에 살짝 따스해진 흰 대리석과, 세월의 흔적이 남은 은은한 베이지빛 회색 줄무늬,
부드럽게 깎인 돌 표면의 질감이 어우러져
살짝 기울어진 사탑은 마치 시간을 품은 채 도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내 시선은 사탑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작은 공항에 가 있었다.
그곳이 오늘 나를 살릴 유일한 구원의 문이었다.
한 손에는 캐리어, 다른 손에는 영국항공 티켓을 꽉 쥔 채,
전광판이 보딩(BOARDING)으로 바뀌자, 급한 마음만큼 빠른 발걸음으로 비행기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굳게 묶어 두었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길게 한숨이 흘러나왔고, 마음이 조용히 속삭였다.
“휴우, 이제 살았다.”
비행기는 눈 덮인 활주로를 지나 5시간 연착 끝에
런던 히드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그 순간,
공항의 차가운 바닥도,
좁은 기내 좌석도 모두 천국처럼 느껴졌다.
피렌체의 여유로운 오후,
런던 폭설의 지옥,
그리고 피사에서 만난 구세주 같은 하루.
롤러코스터 같던 그 모험은,
시간이 흘러도 떠올릴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마음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