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조레스 제도, 바다 위에 작은 쉼표

숨겨진 자연의 신비

by Color Curator

세계문화유산을 따라


어릴 적부터 나는 문화에 꽂혀 있었다.
문화마케팅, 도시 브랜딩... 결국 대학원 시절 내내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인연이 닿은 곳이 바로 영국 ICOMOS였다.
단순한 봉사활동에서 시작된 날개짓이 뜻밖에 인턴십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나는 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피코섬이라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대서양 한가운데 피코섬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색과 감각으로 세계를 읽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되었다.


작은 화산섬에 전세계 학자들이 모여 앉아,

누군가는 전통 춤을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잊혀진 노래와 설화를 꺼내놓았다.

학술적 토론으로 모인 자리는,
서로의 정체성과 문화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그속에서도 나는 자연스레 색과 감정에 집중했다.
문화가 단순히 기록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색채 같은 힘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피코섬, 롤러코스터 같은 여정

포도밭을 따라 걷는 해안길 ⓒ Jessie Festa

피코섬(Ilha da Pico)에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리스본에서 20명 남짓한 소형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장난감 같은 비행기에서 3시간 남짓 안전장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내리자마자 맞이한 날씨는 예상했던 20도의 초여름 날씨가 아닌 서늘한 가을 날씨인 12도였다.
분명 꽃이 만발할 정도라고 들었건만, 완전히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숙소 방에서 인터넷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매일 저녁, 방 안에는 적막함이 찾아왔다.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노트를 펼치고 하루 일과를 써내려갔다.



화산암 돌담 속, 피코 와인


크리아상 벨랴 현무암으로 쌓은 돌담 포도밭 ⓒ Tiago Jorge da Silva Estima

포도밭이라 하면 늘 초록색이 떠오른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피코섬의 풍경은 너무도 달랐다.

검은 화산암 돌담은 낮 동안 햇빛을 흡수해 깊은 블랙과 짙은 차콜 톤으로 빛났고,

그 사이로 자란 포도 잎은 생생한 초록과 황금빛 사이를 오가며 강렬한 채도 대비를 만들었다.

화산이 남긴 거대한 흔적은 놀랍게도 와인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15세기 초 거슬러 올라간다. 이 섬에 정착한 사람들이 들어온 지 불과 10년 만에 포도 재배에 성공했다.

무려 1.5m 높이의 돌담은 거센 대서양 바람과 염분 폭풍을 막아주고,

검은 현무암은 낮 동안 흡수한 열을 밤새 내뿜어 포도의 당도를 높인다.

포도밭마달레나의 ‘크리아상 벨랴(Currais de Criação Velha)’ 돌담 포도밭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미로처럼 얽혀 있었는 모습은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 베르델료(Verdelho), 스파클링용 아린토(Arinto),

달콤한 와인에 어울리는 테란테즈(Terrantez) 품종이 자란다.

자연 건조된 포도는 발효 과정을 거쳐, 알코올 도수가 20%에 달하는 강렬한 와인으로 탄생한다.

화산 토양과 바람, 바다, 사람의 손길이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이 긴 세월에서 쌓인 노하우와 독특한 문화로 유네스코에서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여기서 자란 와인은 짭조름한 바닷바람의 향을 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바다의 테루아’라 불렀다.

여기서 와인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마달레나의 레스토랑에서는 갓 잡은 해산물과 화이트 와인을 함께 페어링 하는 것이다.

한 모금 머금는 순간, 마치 대서양이 입안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디저트로 ‘푸딤 멜(Pudim Mel)’이라는 꿀 푸딩은 달콤하고 바삭한 식감은 와인과도 잘어울린다.



항구의 전설, 피터스 카페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 그 시절 내 최애 책이었다.
첫 장을 넘기면, 아조레스 제도의 해양 문화와 항해자들의 이야기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졌다.

파이알섬 호르타 항구 근처, 전 세계 선원과 고래잡이 어부가 모여 삶과 모험을 나누는 전설적인 공간—

피터스 카페(Peter’s Cafe). 1918년 문을 연 이 카페는 원래 ‘아조리안 하우스(Azorean House)’이였지만, 스포츠를 사랑한 창립자 가족 덕분에 이름이 바뀌었고, ‘Café Sport’ 역시 그 전통을 이어왔다.

지금은 항구 근처 여행자와 선원들이 뒤섞여,

바다와 고래잡이 문화가 스며든 향과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닷바람과 함께 소금기 섞인 공기, 진과 토닉 잔 부딪히는 소리,

어부들의 거친 웃음이 어우러진다.

나는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그 풍경 속에서 알렌 드 보통이 말하던 여행의 철학

자연스레 연결되는 순간을 느꼈다.

누군가는 항해를, 누군가는 바다에서의 모험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 속에서 고요히 나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같은 공간에서 숨쉬고 있다 사실만으로도,

세계 곳곳을 떠돌던 항해자들의 여정을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플로레스 섬, 초록의 천국


플로레스(Ilha das Flores)섬은 피코섬과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검은 화산암과 달리 섬 전체가 초록초록하다.

폭포와 깊은 협곡, 청정수와 습지, 울창한 숲이 풍부하다.
여기서는 나는 자연 탐험과 폭포 관람에만 집중했다.

운동화와 등산복을 가져오지 않은 나의 준비성을 탓했다.

걷는 내내 발은 반창고 투성이가 되었고, 매번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초록한 풀내음과 물소리,

상쾌한 공기가 뒤섞인 자연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러나 발이 아픈 것도 잠시,

눈앞에 펼쳐진 초록의 풍경과 폭포 사이로 보이는 무지개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테르세이라 섬, 자연의 숨겨진 신비


알가르 두 카르바우 동굴 © Jonny Rogers

대서양의 깊은 품, 테르세이라(Ilha da Terceira)섬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이다.
앙구라 두 헤우(Angra do Heroísmo)—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도시는 15세기 대항해 시대의 중간 기착지였다고 한다.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성곽과 분수대, 고풍스러운 교회와 르네상스 건축물들이 살아 있는 역사를 속삭인다. 이 섬의 진짜 매력은 과거의 흔적을 뛰어넘는다.

바로 화산 동굴은 자연의 신비 그 자체이다. 알가르 두 카르바우(Algar do Carvão) 동굴은 약 3,200년 전 화산 활동으로 생긴 용암 굴이다. 깊게 뚫린 수직 수로와 내부를 수놓은 석회암, 다양한 광물층이 어우러진다. 화산 동굴 안은 깊은 회색과 은은한 베이지, 석회암 층의 미묘한 톤 차로 구성된 자연의 팔레트였다. ‘이런 경관을 직접 보다니!’ 마음의 소리가 입밖으로 툭튀어 나왔다. 마치 자연이 신비로운 보물을 숨겨놓은 듯했다.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인간이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새삼 느꼈다.




대서양의 숨겨진 보물


피코, 플로레스, 테르세이라.
섬마다 다른 숨결과 이야기가 있었다.
포도와 와인, 폭포와 초록, 역사와 자연이 교차했다.
그곳에서 문화를 넘어,
섬의 고요한 풍경과 자연의 힘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피코 와인 한 모금 속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느꼈다.


아조라스 제도의 9개의 섬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6개의 다른 섬은 미래의 나를 위해 남겨두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대서양 한 가운데 있는 검은 돌담 포도밭,

동굴과 폭포, 고요한 바다를 거닐던 그 때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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