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빛이 머무는 남부 이탈리아
아버지는 종종 유머 섞인 이야기로 세계사를 들려주시곤 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유독 사과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세계를 움직인 세 개의 사과가 뭔지 아니?”
“아담과 이브, 뉴턴, 그리고..
윌리엄 텔? 세잔느?”
내가 대답하자 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저으셨다.
“둘 다 맞지만, 요즘은 뭐니 뭐니 해도 애플이지.”
그 말과 함께 머릿속에는 역사를 바꾼 사과들이 차례로 스쳐간다.
첫 번째는 에덴동산의 사과.
금지된 열매를 베어 문 순간, 인간은 지식에 대한 욕망과 순수의 상실을 동시에 맛보며 인류 역사의 첫 장을 열었다.
두 번째는 뉴턴의 사과.
고향집 정원에서 떨어진 사과 하나가 우연을 넘어 우주의 질서를 밝히는 중력의 법칙으로 이어졌다.
세 번째는 애플의 사과.
실리콘밸리의 상징이 된 그 로고는, 인간 본성을 탐구하고 금단의 열매처럼 혁신의 문을 열어젖힌 도전의 아이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내 여행에 추가된 나폴리의 사과.
바리항구에서 나폴리로 향하던 버스 안, 아침으로 사과한 입 베어 물었다.
“사각—” 하는 소리와 함께 묘한 쎄함이 밀려왔다. 아니길 바라며 혀끝으로 치아를 더듬었더니, 텅 빈 자리가 느껴졌다. 손에 들린 사과 속에는 반짝이는 금 조각—내 충치 필링이었다.
평소에 잘 먹지도 않던 사과를 왜 하필 그 순간에 먹은 걸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면 그냥 다른 쪽으로 씹으며 버텼을 테지만, 보름은 더 남아 있었다.
결국 임시 치료를 받기로 했다.
문제는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영어를 하는 치과의사를 찾는 것이었다. 지금은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하늘의 별 따기 같았다.
다행히 영국에서 가입해둔 여행보험 덕에 통역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평일임에도 반나절이 지나서야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레몬 향 가득한 길을 따라 올라간 곳, 베이지색 건물의 나무문과 금색 간판은 치과보다는 심리상담소가 더 어울리는 듯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년의 인자한 치과 의사가 긴장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치과 의사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것저것 묻더니, 능숙하게 치료를 해주었다.
“런던에서 온 첫 동양인 환자라니!”라며 내 치아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살펴보는 의사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치료는 한 시간 남짓 걸렸고, 내 여행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었지만, 마음의 무게는 가벼워졌다.
이제 다시 마음 놓고 나폴리 피자를 베어 물 수 있었다.
갓 화덕에서 구워진 바삭한 도우와 진한 토마토 소스의 맛이 내 아쉬움을 달래주는 듯했다.
결국 내 나폴리 여행은 ‘치과 관광’이 되어버렸지만,
이런 황당한 순간들이 덕분에 이 여행은 오래동안 남아있을 것 같다.
홀가분하게 시작한 소렌토 여행.
이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파스텔 핑크 치노 바지와 부드러운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지나가고, 햇살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린넨·실크 원피스와 화사한 반다나를 두른 여자가 그 옆에서 지나갔다. 브라운 가방과 신발은 그들의 움직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뜨거운 햇살 아래, 챙이 넓은 하얀 밀집 모자와 검정 선글라스는 필수 아이템이었다. 사람들의 패션은 풍경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켰다. 그곳에서는 동양인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파란 하늘 사이로 흰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도시 전체는 따스한 노랑빛에 물들어 있었다. 리몬첼로를 닮은 노랑, 파스텔톤 건물, 그리고 바다 위의 배가 어우러져 소렌토만의 색채 리듬을 만들었다.
햇살이 주는 명도와 바다에서 보여지는 채도의 대비가 마음속 깊이 안정감을 선물하는 듯 했다.
나폴리를 내려다보는 지중해의 깊은 파랑, 청명한 하늘, 산과 절벽에 부서지는 햇살까지 — 보는 순간 마음이 환히 밝아진다.
시간마다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푸른 바다와 햇살, 그 덕분일까. 이 도시는 우리 마음까지 자연스레 로맨틱하게 만든다.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없는 자연의 풍경을 즐기다 보면, 자연과 건축, 예술과 사람이 엮어낸 색채 덕분에 도시 전체가 거대한 캔버스처럼 느껴진다.
특히, 소렌토 절벽 위 18세기 빌라를 개조한 대표 호텔 벨뷰 시레네(Hotel Bellevue Syrene)에서는
탁 트인 바다 전망을 감상하며,
여행의 여유를 음미할 수 있었다.
3대째 가족이 운영하는 바그니 델피노(Bagni Delfino)에서 맛본 갓 잡은 해산물과 와인 한 잔.
붉은 노을이 바다와 하늘을 물들이는 그 순간,
모든 것이 충분했다.
이 순간이 멈춘 장면처럼,
마음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러며 생각했다.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와야지.'
소렌토에서 아말피 해안으로 향하는 길,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한 대는 기다려야 할 만큼 좁고 가파른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내 심장은 잠시 멎는 듯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와 절벽, 그리고 해안가 마을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햇살은 눈부시고, 공기는 레몬 향과 바다 내음으로 가득했다.
버스가 아말피 마을에 도착하자, 중세의 시간이 여전히 숨 쉬는 풍경이 펼쳐졌다.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해상 무역으로 번영한 해양 공화국, 아말피. 눈부신 단색으로 칠해진 집들은, 옛날 배 위에서 항구를 찾던 뱃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져, 좁은 골목과 계단, 장인들이 만든 벽화와 모자이크, 성당과 광장 곳곳에서 세월과 이야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해안을 따라 걷다 보니, 또 다른 삶의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 마을에는 햇살을 머금은 도자기들이 가득했다. 알몬드빛 배경 위에 선명한 청색과 노란색 무늬가 피어나는 마조리카(Majolica) 기법은, 장인들이 수세기 동안 이어온 전통을 볼 수 있었다.
여기는 진짜 레몬 천국이었다.
골목골목 크고 즙이 풍부한 레몬이 정원과 상점 곳곳을 채우고, 레몬 비누와 리몬첼로 시음까지 여행자를 유혹했다. 노란빛이 시야와 마음을 동시에 물들이며, 새콤달콤한 향이 나를 유혹했다. ‘델리지아 알 리모네(Delizia al Limone)’. 이름 그대로 레몬의 환희와 기쁨을 담은 쉬폰 케이크였다. 부드러운 케이크 속에 숨겨진 레몬 크림이 입안에서 톡 터지자, 달콤함과 상큼함이 한꺼번에 퍼졌다. 옆 테이블에서는 에스프레소 콘파냐와 함께 여유롭게 디저트를 즐기는 현지인의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다른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를 잠시 잊게 해줄 레몬 샤벳. 큰 레몬을 반으로 갈라 속을 파낸 그 안에는 부드럽고 상큼한 젤라또가 담겨 있었다. 한 입 떠먹는 순간, 단순한 맛을 넘어 마을 사람들의 삶과 시간, 전통이 담긴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눈앞의 풍경, 손끝의 디저트, 코끝을 스치는 레몬 향까지. 아말피의 모든 것이 여행자의 감각을 깨우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순간으로 이어졌다.
나폴리에서 시작된 여행, 소렌토의 절벽, 아말피의 바다까지.
사과 한 입, 와인 한 잔, 레몬 하나가 전해준 맛은,
빨강·파랑·노랑의 빛깔로 마음을 따스하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