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영화평론가 홍수정
Oct 11. 2024
내가 본 한강 작가의 특별함은
'작별하지 않는다' 속 한 바닥으로 본 한강의 언어
사실 세상에는 많은 상이 있고 노벨상은 그중의 하나일 뿐이며, 이미 한국에는 조명받지 못했을 뿐 훌륭한 작가가 무수히 있다. 또 나는 특유의 반골 기질 때문에 화제의 한국인을 보아도 "나까지 환호할 필요는 없겠지"라며 심드렁할 때도 많았다. 그러므로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이 이리도 기쁘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그녀가 한국인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건 내가 그녀의 글을 보며 진정으로 깊이 감탄해 온 시간이 쌓여왔기 때문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미 유명한 창작자를 인정하는 일은 실은 재미가 없다. 남들이 모르는 사람을 추켜세우거나, 이미 유명한 사람을 까는 것은 쉽다. 나만의 안목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게 한강은 그런 수준을 뛰어넘는 작가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녀는 정말, 정말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 왔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게 한강은 언어를 쓰는 법을 공부하게 하는 작가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녀가 역사의 고통을 마주하는 태도, 시적인 스타일 등이 주로 주목받는다. 노벨상 수상 이유가 그랬으니까. 그런데 내가 보는 한강의 특별함은 그녀가 말을 쓰는 방식에 있다.
한강은 쉽고 일상적인 말을 쓴다. 그녀는 젠체하며 아무도 모를 법한 고어를 여기저기 흩뿌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강 작품의 아름다움은 특별한 용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쉬운 말을 아주 세밀하게 조합하고, 섬세하게 배치하고, 이로 인해 여린 리듬이 생겨나는데 이를 끝까지 끈질기게 유지한다.
예를 들어보자. 아래는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다. 내용이 특별하지는 않다. 다만 한강이 이렇게나 글을 잘 쓰나 싶어 감탄했던 부분이다. 한 번만 천천히 읽어보기를 추천함(일부 문장을 발췌했다. 만약 저작권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다).
그 세밀의 밤,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 이차선 도로 쪽으로 통창을 낸 국숫집에서 우리는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중략)
눈 온다.
인선의 말에 나는 국숫발을 이로 끊고서 창밖을 내다봤다.
안 오는데.
차가 지나갈 때 보였어.
곧이어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가자, 전조등 불빛이 비추는 검은 허공 위로 고운 소금 가루 같은 눈발이 반짝였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인선은 식당 밖으로 나갔다. (중략) 어깨와 날개뼈의 깡마른 윤곽이 드러나는 얇은 목 폴라 바람으로, 색이 옅은 청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꼼짝 않고 서 있었을 뿐이다. 택시 한 대가 다시 지나갔고, 전조등이 비추는 허공으로 소금 가루 같은 눈발이 흩어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잊은 사람 같았다. 먹다 만 국수를. 일행인 나를.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이윽고 식당으로 들어온 그녀의 머리에 쌓인 약간의 눈이, 우리 탁자까지 걸어오는 짧은 동안 녹아 자잘한 물방울로 맺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크.. 진짜 죽이지 않음?
'작별하지 않는다' 속 깊고 방대한 세계는 차치하고, 그냥 표현만 봐도 뭔가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일단 늦은 밤, 국숫집, 색이 옅은 청바지 같은 요소들이 이 장면만의 분위기를 잡아준다. 마치 빛바랜 사진 속에 들어온 듯 한 분위기. 이어 인선의 "눈 온다"는 대사는 이후 '승용차 전조등 불빛에 비친 고운 소금 가루 같은 눈발'로 이미지화되어 재현된다. 이것만으로도 작은 마법을 본 듯한데, 그 이후 인선은 눈을 구경하느라 '마치 모든 것을 잊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다. 이것은 편히 앉아 따듯한 국수를 먹는 화자와 대비되며 일종의 긴장감을 불러온다. 이어 인선이 돌아왔을 때 그녀의 머리에 맺힌 자잘한 물방울. 후.. 그러니까 일상에 문득 끼어든 환상적인 시간은 '소금 가루 같은 눈이 자잘한 물방울로 바뀐' 찰나의 시간으로 포착된다.
실제로 책에서 읽으면 두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부분이다. 그런데 한강은 이 손바닥 만한 글에서 밤의 몽환, 일순간 끼어드는 긴장, 그것이 환상으로 승화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 격정이 지나가고 난 이후의 아스라함까지 모두 표현해 낸다. 그런데 여기 어디에도 어렵고 유난스러운 표현은 없다. 그저 단출한 말들 뿐.
이런 스타일을 시도하는 작가는 많다. 하지만 이다지도 조촐하고 완벽하게 구현하는 작가를 나는 한강밖에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게 한강은 대체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녀가 해외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아 기쁜 것과 별개로, 이 과정이 퍽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무엇보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쓰는 작가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한강은 여전히 알려질 부분이 많은 작가이기도 하다.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사실도 기쁘지만 요즘처럼 과격한 말이 주변을 뒤덮은 시기에 그녀의 소설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는 점은 의미가 큰 것 같다. 언어가, 한국어가 이다지도 빛나는 방식으로 소용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알아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