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리는 마침내 자신의 물침대 샵을 오픈합니다.
이때 눈에 띄는 장면이 하나 등장하죠. 알라나가 가게의 중앙에 비키니를 입은 채로 서있고, 개리가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그 모습을 감상합니다. 촉촉한 음악(아마도 폴 매카트니의 Let Me Roll It)과 환한 조명까지. 이 장면은 앞서 등장한 오프닝 장면(알라나가 햇살을 받으며 교정을 걷는 장면)과 매우 비슷하게 환상적으로 보이네요.
누구나 여기까지 보면 로맨틱한 전개를 예상하겠지만, 이어지는 장면은 의외입니다. 알라나는 음악에 맞춰 까딱까딱 춤을 추지만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좀 외로워 보이죠. 개리를 끌어안지만 그는 난감해하며 자리를 피합니다. 음료를 챙겨 다른 여자에게 달려가죠.
개리가 다른 여자와 나가는 것을 보고 비틀대며 쫓아가는 알라나. 이때 비키니를 입은 그녀의 뒷모습은 앞선 장면만큼 아름답지 않아 보여요. 어스름한 밤거리에는 터벅터벅 걸을 때 그 비키니 차림은 부적절해 보이고, 거리의 남자와 키스할 때에는 외설적으로 느껴지죠. 그리고 마지막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지적까지("꼴이 그게 뭐야")
이 장면들의 연쇄를 통해, 비키니의 이미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판타지에서 외설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이동하죠. 이것은 단순히 의상뿐 아니라, 알라나의 감정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개리와의 관계에서 그녀의 위치와 감정은,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곳으로 떨어집니다.
이런 전개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맞습니다. 오프닝 장면과 비슷하죠. 첫사랑의 대상에서 희롱의 대상으로 전환됐던. 그러니까 <리코리쉬 피자>에서 밝은 빛을 받으며 환상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는 반드시 긍정적인 것이라 볼 수 없겠네요. 그것은 오히려 어두운 곳으로의 추락을 예비하는 시그널로 보입니다. PTA는 환상적인 이미지 자체보다는, 그것과 실재 사이의 간극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그리고 그 간극에서 몸을 떠는 누군가를 집요하게 지켜보는 것이죠. 비키니를 입은 알라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다는, 그랬던 그녀가 비틀대며 홀로 집에 가는 순간에 느껴야 했을 감정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알라나는 이제 배우가 되려고 합니다. 그녀는 곧잘 칭찬을 듣지만, 상대 배우는(숀 펜) 그녀에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바에서의 장면을 떠올려볼까요. 개리는 남자들과 있는 알라나를 질투하지만, 정작 알라나는 그곳에서 별다른 존재감이 없습니다.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해도("나는 유대인이에요") 상대는 웃어넘길 뿐이죠.
알라나를 설레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너는 그레이스를 떠오르게 해.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뒤에서 밝혀집니다. 그 말은 알라나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남자에게는 그레이스를 대체할 누군가가 필요했을 따름이고, 알라나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라나가 남자에게 '내 이름이 뭔지 아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오토바이 밖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는 자신의 이름을 묻는 여자가 아니라, 그레이스의 대체자가 앉는 자리니까요.
이때 하나의 아름다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오토바이는 달려가고 모두가 남자의 안위만 걱정할 때, 개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서 알라나에게 도착합니다. 이 순간 알라나를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 개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때 알라나가 느낀 감정이 사랑인지, 고마움인지, 안도감인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아요. 그 모든 것들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애정으로 번진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로맨틱하면서 아픈 장면인데요, 알라나는 사랑을 찾는 데 성공하지만, 인정받는 데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그녀는 계속 오디션에서 허풍을 쳐요. 많은 외국어를 할 수 있고, 운동도 할 수 있다고. 이런 거짓말들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의아했는데, 계속 보다 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어차피 그녀의 능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산업은 그녀의 성적인 매력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에만 관심을 보이죠. 이렇게 알라나의 또 다른 도전도 끝이 납니다.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는 무척 재밌는 캐릭터죠. 그는 자신의 돈, 힘, 섹스 같은 남성적인 요소에 엄청난 자신감을 보입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남을 내리누르려는 모습이 영화 <매그놀리아>의 프랭크(톰 크루즈)와도 비슷해 보이죠. 존이 프랭크의 계보를 이은 것인데, 브레들리 쿠퍼가 맛깔나게 잘 살리더군요. (눈에 가득한 똘끼, 쉴 새 없는 섹스어필이 포인트)
개리는 존으로부터 처음으로 내리 눌립니다. 육체적으로도, 재력으로도. 하다못해 발음조차 못하는 바보 취급을 당하죠. 존이 가족을 거론하자 열이 받은 개리는 복수를 감행합니다. 그런데 그 복수라는 게 약간은 어린아이의 객기 같은 측면이 있죠. 개리는 사고를 치고 알라나와 함께 도망칩니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아직은 상황을 모르는 존이 그들의 트럭에 자연스럽게 스윽 타는 모습이 매우 재밌습니다. 존이 아무렇지 않게 쑥 들어오고, 트럭 안에서는 긴장이 서서히 고조되는 그 부드러운 흐름이 기가 막히죠.
바짝 긴장한 개리와 알라나. 그 와중에 존이 알라나에게 "몇 살이냐"고 묻자 알라나는 처음 "28살"이라고 했다가 바로 "25살"이라고 정정하는데요, 그 짧은 순간 나이를 부풀렸다가 (쫄려서인지) 바로 정정하는 모습이 코믹합니다. 원숙해 보이려는 욕망, 기민한 눈치, 이런 사소한 것들이 알라나의 캐릭터를 보여주죠.
그들은 존을 주유소에 내려두고 도망쳐요. 그리고 개리는 존의 차를 신나게 부수는데, 그 순간 트럭의 기름이 떨어집니다.
바로 다음 순간 이어지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황홀한 장면일 것입니다. 아무 소리도, 빛도 없는 고요하고 깜깜한 밤. 오로지 중력에 의지한 채 알라나는 조심스레 트럭을 몰아 그곳을 빠져나옵니다. 그전까지 이어지던 소란을 모두 잠재우는 아름다운 활강. 그 움직임의 황홀함을 뭐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여러 갈등이 고조된 상태였죠. 개리는 존에게 분노하고, 알라나도 상황에 휘말리고, 그들은 사고를 치고 걸릴까 봐 불안한 상태죠. 개리와 알라나의 관계도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우아한 활강은 그전까지 쌓여있던 긴장을 부드럽게 풀어놓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죠. 이것은 여러 인물들의 갈등을 단숨에 해소하며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는 <매그놀리아>의 그 유명한 '개구리 비' 시퀀스에 비견될 수 있겠네요. 도시의 힘은 작동하지 않고(차 기름이 떨어짐/도시가 정전됨), 오로지 자연의 힘만으로(중력에 의지해서 트럭 운전/개구리 비) 고조되었던 갈등을 씻어낸다는 차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이죠.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전까지 계속해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알라나가 이 순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그들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해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신중하게 운전해 마침내 평지에 도착하는 알라나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면,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는 직접 '운전대를 잡고' 남자들의 기싸움에서 시작된 이 소란을 부드럽게 종결시키죠.
하지만 이어진 장면에서 개리는 장난을 치며 이 순간을 '성애적으로' 즐깁니다. 게다가 뒤에서는 혼자 날뛰던 존이 갑자기 지나가던 여자들에게 플러팅 하는 모습이 보이죠(진짜 연기 잘하죠ㅋㅋ).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알라나의 표정이 허망해 보여요. (딱 현타 온 표정) 그 순간 알라나의 눈에 시장 후보 조엘(베니 샤프디)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으로 떠나죠.
여기까지, 일련의 장면들에서 보이는 알라나의 감정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뜻대로 인정받기 어렵고, 남자들의 기싸움에 휘말리는데, 안간힘을 다해 상황을 수습했더니, 당사자들은 모두 성에 관심이 있는 상황. 그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일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다만 알라나는 이제 보다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시장 후보의 캠프에 들어가게 되지요(그곳에서 알라나는 자신이 '노인 복지 정책' 등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언니에게 강조합니다). 그녀가 캠프를 향해 떠날 때 들려오는 발랄한 배경 음악 'Slip away(사라지다)'까지. 크으. 완벽한 장면이네요.
오늘도 분량조절 실패.. 한참을 썼는데도 할 이야기들이 꽤 남았네요. 그만큼 풍성한 영화라는 뜻이겠죠?
이 글은 예상과 달리 2부가 아닌 3부작이 될 것 같습니다(제발 3부에서 끝나길). 남은 장면들과,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내일마저 하도록 할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