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읽기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가능하면 영화 관람 후 읽어주세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과 관련하여
1. 키워드로 읽기 '태초의 결합'
2. 키워드로 읽기 '색의 의미'
3. 키워드로 읽기 '언어의 실패'
4. 비평
순으로 포스팅될 예정입니다.
키워드로 읽기 1. 태초의 결합
영화의 처음을 함께 기억해보자. 깊고 어두운 물 사이에 난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둥근 방이 나온다. 그 방 한 구석에는 한 여자가 잠들어 있다. 좁은 통로 끝에 있는 물로 가득 찬 방과 잠이 든 생명. 이 풍경은 양수로 가득 찬 자궁 안에서 잠이 든 아이의 형상을 은밀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레이션은 이 영화가 그녀에 관한 오래전 이야기임을 알려준다. 하나의 생명이 자궁 안에서 잠들기 오래 전의 이야기. 그렇다. 이것은 태초의 결합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늘 계란을 삶아서 먹는다. 그녀가 괴생명체(더그 존스)에게 처음 인사를 건넬 때 주는 것도 계란이며, 아침마다 욕조에서 자위를 할 때 켜두는 시계 역시 계란 모양이다. 이처럼 영화는 늘 엘라이자와 계란을 하나의 이미지로 묶어두는데, 영어 egg는 '계란'과 동시에 여성의 '난자'를 의미하는 단어다.
엘라이자가 사는 방은 구조가 꽤 특이하다. 그녀의 방 맞은편에는 비스듬하게 옆 방이 있고, 두 방의 사이로 밖으로 향하는 길고 좁은 통로가 있다. 두 개의 방과 그 사이에 난 긴 통로. 이것은 난소, 질을 포함하는 여성의 생식기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옆 방에 사는 자일스(리처드 젠킨스)가 나이 많은 남자이며 동성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이 영화가 사랑의 여러 형태를 보여준다는 의미도 있으나, 엘라이자가 난자의 이미지를 지니는 것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일스는 엘라이자와 괴생명체 옆에 늘 존재하나 그와 경쟁관계를 맺지 않는다. 전혀 다른 위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괴생명체는 영화상에서 탄탄하고 미끈한 형상을 가지며 물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이를 두고 바로 정자를 흉내 내는군! 하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엘라이자에 대응하는 태초의 남성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오히려 연구실의 책임자인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를 경유하여 드러난다. 스트릭랜드는 괴생명체를 고문할 뿐 아니라 엘라이자에게 은근히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그는 여러모로 괴생명체와 경쟁관계를 형성하는데,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기 좋아하며 긴 전기봉을 늘 들고 다닌다. 스트릭랜드가 긴 막대기의 폭력성, 그리고 사탕을 씹는 둔탁한 소리로 남성성을 드러낸다면, 괴생물체는 미끈하고 단단한 형체와 반짝이는 몸의 불빛으로 아름답고 유려한 남성형을 가져간다.
영화에서 난자와 정자의 결합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엘라이자가 괴생명체와 마음을 나눈 후 버스에서 물방울을 보는 장면이다. 이때 두 개의 물방울은 창 위를 달리다가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그다음 잠깐의 찰나 동안 합쳐진 물방울은 여러 갈래로 나눠지며 이어서 다음 장면이 등장한다. 이 결합과 분열의 이미지가 수정과 세포분열에 관한 영상과 겹쳐 보이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영화의 주요한 코드로 볼 수 있는 것은 쿵 쿵 하고 울리는 소리와(탭댄스 소리와) 물의 유려한 움직임이다. 그런데 스트릭랜드의 성행위 중 쿵쿵대는 소리가 연구소의 소리로 연결되듯, 물과 탁음의 만남 자체가 어떤 에로스를 함의한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인 화장실에서 헤엄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방 안 가득 물이 차오르고, 자일스가 문을 연 순간 물이 한가득 빠져나온다. 그 방 안에 남겨진 남녀는 서로 껴안은 상태다. 자주 등장하는 둔탁한 소리, 물이 차오르고 빠지는 이미지, 그 결과로 얻어진 결합. 이 전체가 성행위의 은유이자 성적 결합에 대한 우화적 표현이다.
마지막에 엘라이자와 괴생물체는 여러 여정을 거쳐 바다에 도달한다. 물속에서 그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헤엄치는 것은 마치 태초의 만남(난자의 주변을 헤엄치는 정자)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그녀를 깨웠을 때, 그녀의 목에 생채기가 나면서 둘의 결합이 완성된다. 그들만의 깊고 푸른 물. 그녀의 몸을 관통하여 새겨진 붉은 생채기. 접촉과 파괴로 시작되는 새로운 결합. 이로써 마지막 순간의 접촉은 첫 장면의 고요한 잠과 이어진다.
태초의 결합이 완성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