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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8. 2020

마지막엔 웃기에 울었다

권진아 - 이별 뒷면

권진아 - 이별 뒷면 듣기


 그 밤, 주황색 유리 파편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몇 해 동안 우리를 비춰 주었던 가로등 아래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싫다고, 이제 더는 아니라고 말하는 내 입 안엔 피가 고여 목구멍으로 흘러들었다.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을 사이가 될 수 있으려나 노래 가사처럼 되뇌며 쓰러졌고, 잡았던 손을 놓았고, 울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적어도, 생애 한 번 그런 사랑도 했었다.




 이른 아침의 식당은 마치 준비된 자리가 다 찬 듯이 정신없이 돌아간다. 찌는 듯한 태양 아래서 일을 하는 듯 모두 흐르는 땀을 목에 걸친 수건으로 대충 닦아다. “사장님! 생선 도착했어요?” “아직이요.어쩌려고 이렇게 늦어? 미치겠다.” “아이고, 큰일이네 정말.” “사장님 가게 내놓은 거 소문이라도 났나. 그러게 누가 장사 접으래요!” 미수는 일이라고는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손으로 잘도 행주를 훔치고 빨고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들을 해치웠다. 그러다 벽에 걸린 시계를 계속 확인했다. 오늘따라 재료가 늦다. 점심시간에 맞추려면 늦겠다고 생각하며 앞치마에 젖은 손을 대충 닦았다. 계산대 옆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과 함께 울리자 오늘 가게를 보러 오겠다고 연락이 왔었는데 혹시나 취소가 될까 불안해져 서둘러 나가 핸드폰을 움켜잡았다. “네, 사장님. 오늘 못 오시는 거 아니죠?” 시간 맞춰 오라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안심하며 전화를 끊는 미수를 보며 홀 청소를 하던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에이, 정말 어디를 가려고.” “죄송해요. 더 좋은 사장님 오실 텐데요.” “다 필요 없어. 우리는 미수 사장만 있으면 된다니까? 아이고, 생선 왔나 보다. 이봐요! 생선 왔어, 나가 봐.” 미수는 부리나케 쫓아 나온 아르바이트생의 등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짐짓 생각했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다고. 커다란 트럭의 문이 열리고 나무 판 위에 줄 지어 누운 생선들이 잘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거래처 사장님도 곧 헤어질 거라는 걸 알게 된 건지 오늘따라 유난히 무뚝뚝했다. “어디 멀리 가요?” “아니요.” “왜 접으시려고요. 장사도 잘 되는 가게를.” 미수는 이제 더 못하겠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삼키고 말았다. 대신 말 못 한다는 눈빛으로 입가엔 미소를 띠었다. 바람이 불자 미수의 머리카락도 기사의 머리카락도 흩날리며 짠 소금 내음이 기분 좋게 스쳐갔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미수는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싱싱한 생선을 한 마리 잡아 올렸다. “오늘도 다 싱싱하네요.” “서울 가세요?” “네?” “서울에서 왔다고 했었잖아요. 가게 접으면 서울 가시는 거 아니에요?” 미수는 또 웃고 말았다. 손에 든 생선을 학생에게 넘겨주며 손을 닦았다. 기사는 ‘아저씨, 그동안 고마웠어요.’ 하고 손을 내밀자 싫다며 토라진 얼굴로 돌아섰다. ‘잘 살아요. 뭐, 어딜 가서든 못 살겠냐만.’ 하며 세상 제일 좋은 인사를 하고는 차에 올랐다. 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미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해 보이곤 시동을 걸었다. 뿌연 먼지가 미수 앞에 흩날리고 생선 비린내도 사라졌다. “사장님!” 귀에 익숙한 부동산 김 사장의 인사에 반갑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어떻게든 제 주인을 만나야 한다고 밤잠도 설쳐가며 가게 걱정을 했던 그녀였다. 그 눈앞엔 익숙한 두 얼굴이 있었다. 처진 볼 살에 인심 가득한, 웃고 있는 눈을 한 부동산 사장과 그였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지 셀 수 없을 만큼 분주한 거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두 번 돌아가면 미수의 식당이 있었다. 처음엔 코 끝을 자극하고 눈 앞에 놓인 음식들이 마음을 건드려 집밥이 그리운 사람들이 찾는 작은 식당, '미수 식당'이었다. 본인의 이름을 과감히 걸고 그곳에서 5년. 미수는 이제 내일이면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왔던 그 밤처럼 걷던 길을 걷고 또 걸으며 눈만 여도 떠오를 수 있게 새겨 넣었다. 그 골목을 돌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게, 그래서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웃으며 그 문을 열어주기를.




 그는 미수의 마음에 있어도 없는 듯 없는 듯하다 있는 듯 그렇게 왔었다. 미수가 그를 떠나리라 마음먹었을 때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시선을 두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30분이 흘렀음에도 수많은 말들을 주고받은 듯 편안해 보였다. 미수 앞에 놓인 찻잔은 이미 비워졌고 컵 받침대에 놓인 티백은 조금씩 말라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미수의 손가락을 가만히 보고 있던 그가 슬며시 웃더니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그러다 미수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반 이상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또 한 번 마셨다. 그런 그의 몸짓이 전해오는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미수는 그만 5년 동안 참아두었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질 것 같았다. 떨리는 손을 들킬까 타는 목을 축일 수도 없어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주먹을 쥐었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부동산 사장님이 소문난 집이라고 칭찬을 하도 하시길래 어떻게 꾸려야 할지 얘기나 좀 해볼까 해서 부랴부랴 내려왔는데 너를 보게 될 줄은...... 괜찮니?" 잠시 숨을 멈추었던 그가 내뱉은 괜찮냐는 말에 미수는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간다고?" "응." 그와 헤어질 때도 그랬었다.  "미수야." 부르지 말지. 미수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경직돼버린 몸을 어쩌지 못했다. 언젠가 그가 자신한번 더 불러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 천 번을 생각했어도 답을 내지 못했었다. 그는 지금 눈 앞에 있고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그래서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다 알 수 있다는 건 이렇게도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가. 미수는 침을 삼키고 아래에 놓인 손을 올려 물컵을 쥐었다. 차마 들어 올리지 못하고 붙잡고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미수야." "그만 나가자." 더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일어서다 테이블에 부딪힌 몸 때문에 커피잔이 흔들렸다.  "헤어지고 싶다는, 네 그 소원이라는 걸 들어주고 나서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보다, 어떻게 하면 너를 잊을 수 있을지 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지야 너를 이해할 수 있을까였어." "나는......" 미수는 테이블을 짚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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