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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03. 2020

한 여름에 다시 만나

정승환 -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무릎 나온 바지 입지 말지?"
"왜?"
"지난번에 사준 바지 있잖아. 그거 입어."
"이 바지가 편한데? 오늘은 이 옷 입을래."
"사줬는데 왜 안 입어? 나 그 바지 싫어. 버리고 새 옷 입어."
"편하기만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건데!!!"

무릎 나온 청바지가 잘못한 건 없다. 무릎 나온 청바지가 편하고 좋은 내 잘못도 아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 건데 그게 무릎 나온 청바지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나가 버렸다. 내 옷장엔 그가 사준 새 청바지도 많았다. 돌아보면, 우리가 함께 한 많은 날 중에 서로를 비단 그것 만으로 할퀴었던 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이 아닐 수도 있고 착각 일 수도 있다고.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가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모를 때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고민하며 집 밖을 서성이곤 했다. 결국 그는 청바지가 아니라 나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고 돌아섰고 나는 내 무릎에 손을 올리고 '왜'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가 언젠가 '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거냐'라고 물었을 때도 지금과 같은 표정이었다.

"너는 왜 나를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해?"
"내가 언제?"
"항상 그래! 네 기준에 맞춰서 입고 말하고 생각하게 하고."
"나 때문에 변하는 게 왜 내 탓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너도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하는 거잖아."
"아니,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해."
"아니? 그 판단은 내가 해야 하는 거야."

그래, 판단은 각자의 몫이니까. 우리는 아마 변해갈 우리를 서로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미래에 선 우리를.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그 접점을 빨리 찾기를. 그러다 우리는 너무 쉽게 서로를 놓아버렸다.

그가 자주 앉던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는 우리 사이가 위기에 놓일 때마다 이곳에 앉아 생각에 잠겼고 돌이켜 한 번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런 내게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도 그래 달라고, 그게 나다운 거라고 했었다. 그냥 놓아버리는 것. 나다운 것. 그 다운 것.

나는 아직도 그 어딘가에 있다.

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해 지는 하늘 아래 그의 모습은 내가 처음 그에게 사랑한다 말했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사랑하지만 그를 위해 잡지 못한다고 변명만 늘어놓고선 결국 떠난 그를 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사준 새 청바지에 두 다리를 넣었다. 나의 미래, 그가 바라는 미래, 우리가 언젠가라고 말했던 그때의 우리. 


 떠난 길을 똑같이 오르내리면서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했다. 아팠을까, 후련했을까, 조금이라도 그리웠을까, 원망했을까, 그럼에도 나를 사랑했을까.

 그가 떠난 여름을 지나 가을, 겨울이 왔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고 나는 여전히 옹졸했다. 나는 한없이 쓸했고 그가 그리웠다. 밤중에 나와 맥주를 비우고 빈 캔맥주를 쌓아 올렸다. 와르르 무너질 때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다시 쌓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내가 다 잘못했다고, 결국 하지 못했던 말을 한참이나 반복하고, 그를 밤새 그리워하다 잠들었다.

느 날 밤에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한국을 떠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안했다고 말했다. 그 길을 내려가며 이미 후회했었다고. 이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아무 소용없겠지만, 지금의 마음이 그때의 마음을 덮지는 않을 거라고. 는 잘 가라는 말이 끝나자 전화를 끊었다. 울음이 터진 의 얼굴이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어떻게 앉아 있을지, 어떤 눈으로 바닥을 보고 있을지 잘 알았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알아서 잡지 못하고, 그 이유 때문에 다시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를 안고 싶다. 그를 안고 사랑한다고,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 너는 전부라고 말하고 싶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나는 그 집을 떠나 회사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다.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도 흐르는 시간처럼 지나갔고 나의 삶도 지루하게, 때론 작은 바람처럼 소소하면서 차갑게 지나쳤다.

그 날은 술에 잔뜩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 맥주를 잔뜩 사서 들고 조명 아래 길어진 람들의 그림자 보며 웃. 더운 밤, 그와 함께 살 때처럼 평상에 자리를 깔고 누워 수박이나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언덕길을 올랐다.

내 앞에 환영처럼 나타난 그와 여전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놓쳤다. 캔맥주들이 언덕 아래로 떼굴떼굴 굴러가며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멍하게 서서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있는 내 앞에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 정말 만나 졌다.

내 말에 그가 웃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는 손을 내밀어 나를 끌어안았다. 검은 하늘 아래 반짝이는 우리의 눈물이 유성처럼 떨어졌다.

“보고 싶었어.


어제처럼 네가 있기를
너와 거리를 걷고
너와 저녁을 먹고
아무렇지 않게 약속한 날들
바다를 보고 싶어
바람이 되고 싶어
제자리로 결국 돌아오는
모든 여행처럼
정승환 -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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