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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2. 2020

나는 믿지 않아요. 나의 비상을

윤하 - No answer(답을 찾지 못한 날)

윤하 - No answer 듣기


매일 저녁 8시. 하숙집을 향해 기다시피 오르는 계단과 오르막길. 살이 쪄 튀어나온 배가 신경 쓰이고 출근길에 꽉 졸라 맨 허리띠는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흐물거리고 있었다. 살을 빼겠노라고 아니 살을 빼 보이겠노라고 장담한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체중계 위에 서보지 않았다. 실행해 보지 않았음에 대한 두려움과 나에 대한 비난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서, 올라서면 단두대에 선 것처럼 심판받을 것 같아서. 그를 만날 땐, 혼자 일 때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었던 밥도 고프지가 않았다. 허리띠를 졸라매도 답답하지 않았고 운동화는 몇 년 동안 신발장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지금 내가 신고 있는 건 운동화. 갈색 운동화, 어제 새로 산 운동화. 신발에 발을 넣는 순간 너무 편해서 눈물이 날 것 같.

나는 기다리는 게 싫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싫고 1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동안의 기다림도 싫다. 문을 열려고 불을 켜는 것도 씻는 준비를 하는 것도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밥을 먹는 것도. 그런데도 나는 부산하게 움직인다. " 잘 모르겠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지금의 너를 잘 모르겠어."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으면서 다 아는 것처럼 알겠다고, 시간을 갖자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갖는 동안 보고 싶은 마음 일곱 번 참아보자. 여덟 번째 다시 만나는 거야." 대체 왜 그런 조건이 붙는지도 몰랐다. 세지도 않았고 세고 싶지도 않았지만 나는 오기를 부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까짓 일곱 번이 뭐가 대수라고.' 나는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릎이 시큰거림을 느다. 살이 찌면서 내 발목은 아파고 날 옥죄 브래지어와 팬티를 감당할 수가 없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큰 벌을 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날 사진 속의 내 모습은 마른 몸을 하고 더없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이 쪄서 헤어진 게 아닌데 나는 팔뚝을 쥐었다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쇼핑을 보다가 속옷 세트 매진 임박 소리에 나도 모르게 구매 버튼을 눌렀다. 택배를 기다리면서 나는 마치 곧 도 함께 올 것처럼 두근두근 하는 걸 느꼈다. 나는 새 속옷을 입고 새로 산 운동화를 신다. 금 내가 얼마나 편한지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를 기다려 줄 사람도 나를 믿어줄 사람도 나의 비상을 함께 꿈꾸어줄 사람도 없다. 가끔은 그가 아직도 나를 기다려 줄까 숨 가쁜 상상도 해보지만 좁다란 계단을 올라가며 난간을 꽉 쥔 손에서는 땀밖에 나오지 않다.

나는 매일 계단에 나를 버리고 오른다. 나의 땀도 나의 살도 가끔은 옷을 다 벗어버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상상도 한다. 바람이 불어온다. 비가 내리면 작은 바가지가 베란다 곳곳에 놓인다. 툭, 틱, 탁, 챙. 바가지가 출렁거리면 나는 비우고 비운다. 물을 비우며 지낸 새벽,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나무 냄새가 났다. 내가 내려가야 할 저 언덕과 계단을 보며, 살찐 내 몸을 보며 예쁜 옷을 골랐다. 맞지 않는 옷을 대 보며 앞으로의 나를 꿈꾼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답을 찾지 못한 날
아침에 눈을 뜨면
뭐가 달라질까
밤잠을 설치다가
문득 생각이 나
이토록 모자란 난
어떤 쓸모일까
답을 찾지 못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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